3장: 멜랑콜리아의 시대 - 상실을 모르는 상실

by 홍종민


애도와 멜랑콜리아


대리언 리더는 『우리는 왜 우울할까?』에서 프로이트의 이별을 소개한다. "애도하는 사람은 무엇을 상실했는지 어느 정도 아는 반면, 멜랑콜리아 환자에게는 무엇을 상실했는지가 늘 분명하지는 않다."

더 정확히는 "멜랑콜리아 환자는 자기가 누구를 상실했는지 알 경우에도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상실했는지는 모른다.'"

현대인의 우울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공동체? 의미? 신? 자연? 아니면 더 근본적인 무언가?

라캉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대타자(the big Other)'를 잃었다. 대타자는 상징적 질서의 보증자다. 신, 전통, 권위... 이런 것들이 무너진 시대.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후, 우리는 의미의 보증자 없이 살아간다.


자기비난의 메커니즘


프로이트는 멜랑콜리아의 핵심 특징으로 '자존감의 저하'를 꼽는다. "멜랑콜리아 환자는 자기를 불쌍하고 쓸모없고 비루한 인간으로 표현한다."

SNS를 보면 이런 자기비난이 넘쳐난다. "나는 쓰레기야", "인생 망했어", "존재 자체가 민폐"... 겉으로는 자조적 유머처럼 포장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자기혐오가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통찰은 더 깊다. "멜랑콜리아 환자의 자기비난은 사실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비난이다." 우리가 자신을 미워할 때, 실제로는 다른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

리더가 소개하는 한 여성의 사례. "나는 할 말이 없다"와 "내 안에 뭔가 있다"는 모순적 증상. 분석 결과 이것은 "유년기와 사춘기 때 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받은 비난이 투영된 표현들"이었다.

현대인의 자기계발 강박도 마찬가지다. 더 생산적이어야 하고, 더 성공해야 하고, 더 행복해야 한다는 목소리. 이것은 정말 우리 목소리일까? 아니면 내면화된 '초자아(super-ego)'의 명령일까?


억압된 분노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리더의 지적이다.

한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애도하며 꾼 꿈. "복수를 위해 묘석을 산산이 부수는 끔찍한 꿈." 의식적으로는 슬픔만 느꼈지만, 무의식에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특정한 사람에 대한 강렬한 애착이 존재하는 거의 모든 사례에서 우리는 애틋한 사랑 뒤에 감춰진 무의식적인 증오를 발견한다."

현대 사회는 분노를 금지한다. 특히 부모, 권위,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는 표현할 수 없다. 그 결과? "분노를 말로 표현하지 못하면 위축되고 소진될 것이다."

번아웃, 무기력, 만성피로... 이 모든 것이 억압된 분노의 신체화일 수 있다. 우리는 화낼 수 없기에 우울해진다.

작년 겨울, 나는 아무 이유 없이 3개월 동안 몸살을 앓았다.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종이에 화나는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상사, 부모, 세상, 그리고 나 자신. 종이가 새까맣게 될 때까지 썼다. 그리고 찢었다. 놀랍게도 다음 날 몸살이 나았다. 우연일까? 아니면 리더가 말한 대로 억압된 분노가 몸을 통해 말하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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