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왜 아들을 미워할까

by 홍종민

히로카즈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료타가 6년 만에 알게 된 진실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관객들이 답답함을 느꼈다. 완벽주의자인 그가 왜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는지, 왜 혈연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료타의 그 모습이 어쩐지 익숙해 보였다. 마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아버지들의 모습 같았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다. 사랑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까지. 최광현 교수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 특정 상처를 갖고 있는 경우, 보고 싶지 않은 이면을 자녀에게서 보게 되면 거부하거나 회피하려고 한다"(최광현, 2023: 130)고 했다. 영화는 픽션이지만, 그 속의 아버지 마음은 현실 그 자체다.


완벽함에 갇힌 아버지의 마음


료타는 성공한 건축가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하고,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런 그에게 아들 케이타와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6년간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료타의 반응을 자세히 보면, 단순히 혈연에 대한 집착만은 아니었다.

료타는 케이타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부터 느꼈다. 피아노를 치는 아들, 자유분방한 아들, 완벽하지 않은 아들. 그 모습이 자신의 어린 시절과는 너무 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과 너무 비슷했다. 바로 여기서 투사가 시작된다.

동네 마트에서 본 한 아버지가 떠오른다. 초등학생 아들이 과자 코너에서 이것저것 만지며 떠들자 "가만히 있어!"라고 소리쳤다. 그 아버지의 표정에는 짜증 너머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 자신이 그래서 혼났던 기억을 되살리는 것 같았다. 료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투사'는 자신의 감정이나 특성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방어기제다. 칼 융은 이를 통해 우리가 자신의 그림자와 마주하게 된다고 봤다. 료타가 케이타를 볼 때 느끼는 불편함, 그건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였던 거다.

료타에게 그림자는 완벽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자신, 자유롭게 살지 못했던 자신. 그래서 케이타의 자유로운 모습이 불편했던 것이다. 아들을 통해 자신의 억압된 모습을 보게 된 거다. 그게 바로 부정적 투사의 실체다.

근처 식당에서 일하는 한 아저씨도 비슷했다. 중학생 아들이 성적표를 들고 왔을 때 "이게 뭐야, 수학이 왜 이래?"라며 한숨을 쉬더라. 그런데 그 아저씨 자신도 학창시절 수학을 못했다고 했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아들에게서 다시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었던 거다.


긍정적 투사의 함정


그런데 투사는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료타가 류세이를 만났을 때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혈연상 아들인 류세이는 자신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차분하고, 계획적이고, 완벽주의 성향까지. 료타는 류세이에게서 자신이 원했던 '이상적인 아들'을 발견한 것이다.

최광현 교수는 "긍정적인 투사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자신의 인격적인 측면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한다"(최광현, 2023: 132)고 설명한다. 료타가 류세이에게 느낀 것이 바로 이런 감정이다. 자신의 '성공한 모습'을 아들에게 투사하며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긍정적 투사도 문제가 있다. 료타는 류세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 자신의 기대와 욕망을 투사해서 보고 있었을 뿐이다. 류세이가 보여준 조용한 성격, 신중한 행동들을 '우수함'으로만 해석했다. 아이의 진짜 마음은 보지 못한 채 말이다.

동네 학원가에서 만난 한 부모도 그랬다. "우리 아들은 수학 영재야. 나도 어릴 때 수학 잘했거든"이라고 자랑했다. 그런데 아이 표정을 보니 뭔가 부담스러워 보였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료타와 류세이의 관계와 닮아 있었다.

영화 '굿 윌 헌팅'의 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양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관계 맺기를 두려워했다. 투사받은 아이들은 그렇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어버리게 된다. 부모의 기대나 거부감에 맞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다.

윌이 숀 상담사를 만나기 전까지 보여준 방어적 태도, 그게 바로 투사받은 아이의 전형이다. 진짜 자신을 보여주면 또 상처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료타의 두 아들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의 투사에 반응하고 있었다.


진짜 아버지가 되는 길


영화 후반부, 료타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다. 혈연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6년간 함께 보낸 시간, 그 속에서 쌓인 진짜 관계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제야 료타는 케이타를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한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개성화' 과정으로 보면, 료타는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아들에게 투사했던 자신의 상처와 기대를 되찾아오는 과정. 그럴 때 비로소 아들을 독립된 개체로 볼 수 있게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진짜 부성애다. 아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자신의 한계도 인정할 수 있으면 된다. 료타가 마지막에 케이타와 함께 종이비행기를 접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더 이상 완벽한 비행기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아들과 함께 만드는 그 시간 자체가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된 거다.

최광현 교수는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지금 아들은 삼수생이다. 고생하는 아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적이 수직 상승을 한다는 사실이다. 나도 '대기만성형'으로 어릴 때보다는 성인이 되어서 학업의 성취가 좋았다"(최광현, 2023: 131-132). 아들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거다.

어제 공원에서 본 한 아버지와 아들이 떠오른다.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는데, 아버지는 야단치지 않고 그냥 일으켜 세워줬다. "괜찮아, 다시 해보자"고 말하는 그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 사랑, 그게 진짜 부성애다.

료타가 결국 깨달은 것도 그거였다. 아들이 자신의 연장선이 아니라 독립된 존재라는 것. 혈연이 아니어도, 완벽하지 않아도, 함께 보낸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 그래서일까. 마지막 장면에서 료타가 보여준 미소는 그렇게 따뜻해 보였다.

아버지의 투사는 숙명이다.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는 있다. 자신의 상처를 아들에게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치유해 나가는 것. 그럴 때 아버지도, 아들도 자유로워진다. 료타가 그랬듯이, 우리 모두도 그렇게 진짜 아버지, 진짜 아들이 되어가는 것이다.


최광현(2023).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다. 서울: 유노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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