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말년에 프랑스 앙부아즈 성에서 생을 마감할 때, 그의 손에는 여전히 미완성 작품들이 남아있었다. <모나리자>조차 그는 끝까지 완성작이라 여기지 않았다. 죽음 직전까지 손을 대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시간을 거슬러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보면 답이 보인다.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그 소년은 세상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어했다. 새가 어떻게 나는지, 물이 어떻게 흐르는지, 인간의 심장이 어떻게 뛰는지. 그 절망적인 갈증이 결국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김서영 교수는 "프로이트는 승화를 '출구'라고 부릅니다. 충동의 목표가 바뀐다고 말합니다"(김서영, 2024: 144)라고 했다. 다 빈치의 인정 욕구가 바로 그렇게 예술과 과학으로 승화된 것이다.
다 빈치의 끝없는 탐구욕이 만든 기적
다 빈치의 노트를 들여다보면 승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생하게 보인다. 그는 자신이 기록한 글에서 "장애물이 나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모든 장애물은 엄격한 필요에 의해 파괴된다"고 썼다. 이건 단순한 의지드립이 아니었다. 진짜 절박함에서 나온 외침이었다.
사생아 신분으로 태어난 다 빈치는 아버지 세르 피에로로부터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정식 교육도 받을 수 없었고, 라틴어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문맹"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바로 그 결핍이 그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남들이 책으로 배우는 걸 그는 직접 관찰하고 실험해서 터득했다. 새의 날개를 해부하고, 물의 흐름을 스케치하고, 인체의 구조를 탐구했다.
프로이트는 다 빈치를 승화의 완벽한 사례로 제시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거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충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다"는 과학적 탐구욕으로 바꿔냈다. 그 결과 <최후의 만찬>이나 비행기 설계도 같은 걸작들이 탄생했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거나 발명을 한 게 아니라,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를 창조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더 놀라운 건 그가 평생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그림이 미완성이었고, 설계도들도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바로 승화의 특징이다. 목표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가능성이 진짜 의미다. 다 빈치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인류 전체의 인정을 받는 불멸의 예술가가 됐다.
카프카의 공포가 낳은 현대문학
프란츠 카프카는 또 다른 차원의 승화를 보여준다. 그가 아버지 헤르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당신 앞에서 나는 자신감을 잃었고, 그 대신 무한한 죄의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당신의 세계에서 나는 항상 패배자였습니다."
헤르만 카프카는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아들에게는 절대권력자였다. 카프카는 평생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법학을 전공하고 보험회사에 다닌 것도 아버지의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억압적 관계가 역설적으로 20세기 최고의 문학을 탄생시켰다.
김서영 교수는 "소원을 찾는다고 표현은 하지만, 무의식과 의식, 몸과 마음의 소통을 통해 나를 제일 행복하게 하는 소원을 만들어가는 거에요"(김서영, 2024: 145)라고 설명했다. 카프카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원초적 욕구를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하는 이야기는 사실 카프카 자신이 아버지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의 예술적 표현이었다.
카프카의 일기를 보면 그가 이 과정을 의식적으로 선택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글쓰기는 나에게 유일한 내면의 가능성이다. 나는 문학으로만 존재한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도피의 수단이 아니라 창조의 원동력으로 활용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인류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불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성>이나 <소송> 같은 작품들을 보면 개인적 트라우마가 얼마나 거대한 사회적 통찰로 승화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억압을 관료제 사회의 부조리로, 개인적 죄의식을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으로 확장시켰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이 지금도 전 세계 독자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이다.
상처를 창조로 바꾸는 마음의 연금술
이런 천재들의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승화는 천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김서영 교수는 "길을 걷고 있다는 건 우리가 갇혀 있지 않다는 뜻이죠. 그래서 프로이트가 승화를 출구라고 부르는 겁니다"(김서영, 2024: 145)라고 했다. 우리 모두에게 그 출구가 열려 있다는 뜻이다.
다 빈치가 사생아라는 콤플렉스를 과학적 탐구로 승화시켰듯이, 카프카가 아버지 공포를 문학으로 승화시켰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승화를 실천하고 있다.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간호사가 되어 환자 돌봄에서 진짜 보람을 찾는 사람, 가수를 꿈꿨지만 음향 기사가 되어 다른 가수들의 꿈을 도와주는 사람, 화가가 되려 했지만 디자이너가 되어 일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이 모든 것이 승화다.
중요한 건 포기가 아니라 변화라는 점이다. 우리의 좌절과 상처, 채워지지 않는 욕망들이 새로운 창조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다 빈치처럼, 카프카처럼 말이다. 당신이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이 소원의 길이다. 비록 처음 계획했던 목적지와는 다를지라도.
김서영(2024). 한 사람을 위한 정신분석. 서울: B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