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를 엄마라고 착각한 변호사

by 홍종민

당신의 안전한 곳은 어디인가


한 여성이 있었다. 대기업 임원이었다. 강남에 아파트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매일 점심시간마다 회사 근처 공원에 갔다. 특정 벤치에 앉았다. 같은 자리. 비가 와도 갔다. 눈이 와도 갔다. 20년간 반복했다.

주위를 보면 너나없이 이런 사람들 천지다. 매일 같은 카페 자리만 고집하는 사람, 회사 휴게실 구석 소파에만 앉는 사람, 지하철에서 같은 칸만 타는 사람들. 피부로 실감한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는 걸.


정신분석가 조안 시밍턴이 관찰한 런던의 한 변호사도 그랬다. 매일 공원 벤치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따뜻한 집도 있고 멋진 사무실도 있는데 굳이 차가운 벤치에서. 시밍턴이 물었다. "당신 지금 벤치를 엄마 무릎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 순간 그 당당했던 변호사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딴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그런 아기가 아니라고요!"(시밍턴, 2022: 18).

바로 이거다. 분노가 증거다. 사람들이 가장 화를 내는 해석이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 그 변호사의 분노를 보는 순간 확신했다. 정곡을 찔렀구나. 분명하다.


나폴레옹도 벤치를 찾았다


그 여성 임원을 다시 보자. 동료들에게 물어봐도 그녀는 강했다. 아무 문제없이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벤치가 없으면 불안했다. 출장을 가면 잠을 못 잤다. 벤치에 앉지 못하는 날은 하루 종일 초조했다.

어느 날 그녀가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늘 바빴다. 어머니는 직장에서 돌아오면 소파에 앉아 쉬었다. 그녀는 그 옆에 앉아 어머니 팔을 베고 누웠다. 그게 하루 중 유일한 어머니와의 시간이었다. 소파의 감촉, 어머니 옷의 냄새, 옆에서 들리는 숨소리. 그게 안전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 소파는 공원 벤치가 됐다.

이게 위니코트가 말한 중간대상이다. 어머니와 나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완전히 독립하지도 못했고 완전히 의존하지도 못한 중간 지대. 그런데 바로 그 애매함이 필요하다. 산소처럼 필요하다고 착각한다. 산소 없는 곳에서 숨 쉬는 것처럼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나폴레옹을 보라. 유럽을 제패했던 그 황제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뭘 했는지 아는가. 매일 정원의 돌벤치에 앉아서 엄마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가 나를 무릎에 앉히고 자장가를 불러주셨다"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황제 나폴레옹이 돌벤치에서 엄마를 찾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누가 그걸 지적하면 발끈했다. "나는 황제다! 어떻게 나를 아이 취급하느냐!". 그 런던 변호사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결국 사람은 사람이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아무리 성공해도 마음 깊은 곳에는 엄마 무릎이 그리운 아이가 산다. 예외가 없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절대로 줄어들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 간절해진다. 그렇게 작동한다.

시밍턴의 기록에 따르면 그 변호사는 "벤치에 앉기 전에 반드시 표면을 손으로 쓸어내고, 도시락을 펼쳐놓기 전에 벤치 옆면을 몇 번 두드려보고, 다 먹고 나서는 벤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시밍턴, 2022: 18). 이게 뭐냐. 엄마 무릎의 온도를 확인하는 거다. 엄마가 거기 있는지 확인하는 거다. 성인이 된 몸으로는 무릎에 앉을 수 없으니까 벤치라는 대체물로 그 감각을 재현하려는 거다.


분노 뒤에 숨은 갈망


한 남성이 있었다. 스타트업 대표였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차 안에 들어가 앉았다. 주차장에 세워둔 자기 차. 엔진도 켜지 않았다. 그냥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30분에서 1시간씩. 직원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가 어느 날 말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했다고. 아버지는 밤늦게 들어와 차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가 잠에서 깨면 차로 나갔다. 아버지 옆자리에 앉았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냥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게 둘만의 시간이었다. 40살이 된 지금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하지만 차 안에 앉으면 아버지가 느껴진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 안전함이 필요하다.

어느 날 직원이 물었다. "대표님 왜 매번 차에 가세요?". 그는 화를 냈다. "그냥 집중하는 거야. 왜 그걸 물어?". 직원은 놀랐다. 단순한 질문이었는데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화가 답이었다. 뭔가 건드려진 것이다. 분노는 방어다.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는 증거다.


처칠도 그랬다. 대영제국을 구한 그 위대한 총리에게도 비밀이 있었다. D-데이 작전을 결정할 때 철의 장막 연설을 준비할 때 그는 어디에 있었을까. 욕조 안에 있었다. 처칠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긴 시간을 보냈다. 그 자신이 회고록에서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욕조 속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어머니 제니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윈스턴 넌 할 수 있어"라는 격려의 목소리가. 욕조가 어머니의 자궁이었던 거다.

누군가 이런 처칠의 "욕조 의존"을 지적했을 때 어떻게 반응했을까. 당연히 화를 냈다. "나는 대영제국의 총리인데 왜 자꾸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가!". 그 변호사 나폴레옹과 똑같은 패턴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이거다. 그들이 화를 낸 건 그 해석이 틀려서가 아니라 너무 정확해서였다. 자신도 모르게 숨겨온 가장 깊은 비밀을 들킨 기분이었던 거다. 그런 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평생 벤치에만 앉아 살 수는 없다.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변화는 벤치를 버리는 게 아니다. 벤치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전치를 이해하는 게 먼저다.

정신분석에서 이걸 '전치(displacement)'라고 부른다. 한 대상(엄마 무릎)에 대한 욕구를 다른 대상(벤치)으로 옮기는 거다. 원래 대상은 접근 불가능하니까 대체 대상을 찾는 거다. 라캉은 이를 '환유(metonymy)'라고 했다. 욕망이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끝없이 미끄러진다는 거다.

엄마 무릎 → 벤치. 이게 전치다. 나쁜 게 아니다. 생존 전략이었다. 하지만 평생 그 전치에 갇혀 살 순 없다. 변화가 필요하다.

그 임원 여성은 1년에 걸쳐 변화했다.


첫 단계는 인정이었다. "나는 벤치가 필요해. 그게 나의 안전한 곳이야". 스스로에게 말하니 눈물이 났다. 40년간 숨겨온 비밀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했다. "나는 엄마 무릎을 벤치로 전치했구나. 그게 내 방식이었구나."


두 번째 단계는 이해였다. 왜 벤치가 필요한지 깊이 들여다봤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 그 결핍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것. 벤치는 그 결핍을 채우는 방법이었다는 것.

전치는 욕망의 미끄러짐이다. 엄마 무릎이 없으니 벤치를 찾았고, 벤치가 없으면 또 다른 걸 찾을 거다. 욕망은 계속 미끄러진다. 라캉이 말한 대로,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다른 대상으로 계속 옮겨갈 뿐이다.


세 번째 단계는 내면화였다. 외부 대상이 아니라 내면에 안전함을 만들었다. "나 자신이 나의 안전한 곳이야". 벤치 없이도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출장을 가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이게 결정적이다. 전치의 사슬을 끊은 거다. 엄마 무릎 → 벤치 → 또 다른 대상... 이 끝없는 미끄러짐을 멈춘 거다. 외부 대상에서 내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면에 벤치를 만든 거였다.

바로 이거다. 전치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내면화하는 것. 그게 변화의 길이다.


그 스타트업 대표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처음엔 차 없이는 결정을 못 내렸다. 하지만 1년 후에는 달라졌다. 차가 없어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차가 아니라 그 안에서 느끼던 안전함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안전함을 이제 자기 안에서 만들 수 있었다.

한 가지는 명백하다. 벤치를 버리는 게 성숙이 아니다. 벤치를 인정하는 게 성숙이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충분히 그 안전함을 느껴보는 것. 그 다음에 천천히 내면화하는 것.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벤치가 되어주는 것.

그 임원 여성은 2년 후 후배를 만났다. 후배가 힘들어할 때 곁에 있어줬다. "힘들 때 안전한 곳이 필요해. 나한테 언제든 연락해". 그녀가 후배의 벤치가 된 거였다. 그 스타트업 대표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는 직원들의 안전한 곳이 됐다. 직원들이 힘들 때 찾아온다. 그는 언제나 시간을 낸다.


나폴레옹도 처칠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했기 때문에 더 강해질 수 있었다. 돌벤치와 욕조에서 충분히 위로받은 후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벤치가 되어줄 수 있었다. 부하들의 아버지가 되고 국민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당신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가. 아직도 벤치를 찾고 있는가. 벤치를 인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누군가의 벤치가 되어주고 있는가. 어느 단계든 괜찮다. 중요한 건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 안의 어린아이가 벤치를 엄마라고 착각해도 괜찮다. 그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거라면. 다만 평생 거기에만 머물지는 마라. 충분히 위로받은 후에는 이제 일어설 때다. 다른 사람의 벤치가 되어줄 때다. 그게 바로 진정한 어른이 되는 길이다. 변화는 온다. 반드시 온다. 거기까지다.




조안 시밍턴, & 네빌 시밍턴. (2022). 윌프레드 비온 입문 (임말희 역). 눈출판그룹. (원저 출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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