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닭속에 숨겨진 마음

애착과 공감의 심리학

by 홍종민

영영 버려진 아이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요구하라는 말은 산소 없는 곳에서 숨 쉬고 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생존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똑똑하고 예쁘고 착해도 그것과 상관없이 나를 존재 자체로 받아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사람은 살 수 있다. 생존의 최소 조건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정말 간절히 원하는 사랑을 받게 되면 오히려 파괴하려고 든다. 좋게 해주는 사람을 밀어낸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승민이 서연을 대하는 방식처럼. 왜 그럴까?


주위를 보면 너나없이 이런 사람들 천지다. 연인이 깜짝 선물을 주면 "갑자기 왜 이래?"라고 의심한다. 부모가 용돈을 주면 "이제 와서 뭐 하러"라고 퉁명스럽게 굴다. 칭찬을 들으면 어색해하고, 관심을 받으면 부담스러워한다. 사랑받고 싶어하면서도 정작 사랑을 받으면 도망치려 한다. 성귀자는 한 상담 사례에서 이런 장면을 보여준다. "딸은 다음 날도 간정찜닭, 그다음 날도 간장찜닭을 줄곧 시켜달라고 했다"(성귀자, 2023: 201). 먹지도 않을 음식을 계속 시켜달라고 하는 아이. 그 안에 숨겨진 진짜 마음을 알면 소름이 돋는다.


사랑이 무서운 마음의 비밀


그게 바로 우리의 모순된 마음이다.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왜? 한 번 가졌다가 잃으면 더 아프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갖지 않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이 그렇게 작동한다.

건축학개론의 승민을 다시 보자. 15년 만에 서연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의 반응을 기억하는가? "왜 지금 와서?" 마음속으로는 울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차갑게 밀어냈다. 서연이 "그때 편지 못 받았어"라고 말했을 때도 "상관없어"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 눈빛을 보라. 떨리고 있지 않았나?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지 않았나?


존 볼비가 발견한 '애착 이론'이 바로 이런 현상을 설명한다. 어린 시절 주 양육자와의 관계가 평생의 관계 패턴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안정적으로 사랑받은 아이는 '안정 애착'을 형성해서 다른 사람과도 건강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중간중간 버려지거나 무시당한 경험이 있으면 '불안정 애착'이 생긴다.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한다.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사랑을 의심한다. 승민이 바로 그랬다.

바로 이거다. 진짜 소중한 것일수록 믿기 어렵다. 혹시 환상은 아닐까, 혹시 착각은 아닐까 의심한다. 그래서 시험한다. 일부러 문제를 일으켜서 정말로 떠나는지 확인해본다. 찜닭처럼 말이다. 승민이 서연에게 차갑게 굴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정말 날 사랑하는지, 정말 진심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동네 카페에서 본 그 사장님 이야기를 해보자. 30대 초반 여성인데, 남자친구가 깜짝 이벤트를 해줄 때마다 불편해한다고 했다. "왜 갑자기 이래?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의심부터 한다는 거다. 알고 보니 어릴 때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고 나서 미안하다고 선물을 주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좋게 해주는 건 뭔가 숨기는 게 있을 때'라고 학습된 거였다. 사랑의 표현을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게 된 거다.


시험이라는 이름의 절망적 확인


그 아이가 매일 찜닭을 시켜달라고 한 건 음식 때문이 아니었다. 엄마를 시험하려는 거였다. 정말 끝까지 참을 건가, 언제까지 좋게 해줄 건가를 확인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였다.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었다.

우리 모두 그런 시험을 한다. 연인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보고, 친구에게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해보고, 부모에게 반항해본다. 그래도 떠나지 않는지, 그래도 사랑하는지 확인하려고. 진짜 사랑인지 가짜 사랑인지 구별하려고.


하인츠 코헛이 말한 '자기대상' 개념을 알면 이해가 쉬워진다. 자기대상이란 내 자존감을 떠받쳐주는 특별한 존재를 뜻한다. 거울처럼 나를 비춰주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확인해주는 사람. 부모가 바로 아이에게 그런 존재여야 한다. "네가 최고야, 엄마는 너를 믿어"라고 말해주는 사람. 그런데 그 자기대상이 없거나 불안정하면 평생 찾아 헤맨다. 다른 사람을 통해 확인받으려고 한다.


찜닭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에게 엄마는 불안정한 자기대상이었다. 100일 만에 친정에 맡겨져서 7년간 떨어져 살았으니까. 엄마가 좋게 해주니까 오히려 불안해진 거다. '이 엄마가 진짜 내 편인가? 또 버리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든 거다. 그래서 시험했다. 짜증나는 요구를 계속해서 정말 끝까지 참는지 확인해본 거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시험은 사실 절망의 표현이다. "어차피 떠날 거 아니야?"라는 체념이다. 동시에 간절한 소원이기도 하다. "제발 떠나지 마"라는 외침이다. 성귀자는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딸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들어주려고 노력했다"(성귀자, 2023: 204)고 했다. 바로 이 지점이 핵심이다. 시험에 통과하는 방법은 시험 자체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진짜 마음을 보는 거다.

버스정류장에서 본 그 고등학생도 그랬다. 엄마가 용돈을 주려고 하니까 "필요 없어"라고 퉁명스럽게 거절했다. 하지만 엄마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라며 주머니에 넣어주니까 슬쩍 웃더라. 거절하면서도 받고 싶었던 거다. 관심받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솔직하게 표현할 용기는 없었던 거다. 혹시 거절당할까 봐.


공감이라는 마법의 열쇠


결국 답은 공감이다. 상대방의 이상한 행동 뒤에 숨은 진짜 마음을 보는 것. 찜닭을 원하는 게 아니라 관심을 원한다는 걸 아는 것. 말썽을 피우는 게 아니라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걸 깨닫는 것.

영화 「라라랜드」에서 미아가 오디션에 계속 떨어질 때를 보자. 세바스찬이 해준 게 무엇이었나? "너는 할 수 있어"라는 빈말이 아니었다. "네 꿈을 내가 믿는다"는 진심이었다. 미아가 "아무도 내 연기를 안 봐"라고 절망할 때, 세바스찬은 "나는 봤어"라고 말했다. 미아의 불안과 두려움을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었다. 판단하지 않고, 조언하지 않고, 그냥 함께 있어주는 것이었다.

그게 미아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 힘이었다. 마지막 오디션에서 부른 '오디션(The Fools Who Dream)' 노래를 기억하는가? "여기 바보들을 위해, 꿈꾸는 바보들을 위해." 세바스찬이 자신의 꿈을 믿어줬기에 미아도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된 거다. 그게 진짜 공감의 힘이다.


도널드 위니코트가 말한 '충분히 좋은 엄마'도 바로 이런 뜻이다.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충분히 좋은 엄마. 아이의 마음을 읽고, 아이가 원하는 걸 알아채고,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엄마. 실수해도 되고, 화를 내도 되지만, 아이의 진짜 마음은 놓치지 않는 엄마. 그런 엄마가 있으면 아이는 세상을 신뢰하게 된다. 다른 사람도 신뢰하게 된다.

근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의 행동만 본다. 마음은 보지 못한다. 성과만 보고, 결과만 보고, 겉모습만 본다. 찜닭을 시켜달라고 하면 "왜 맨날 찜닭이야?"라고 짜증낸다. 그 뒤에 숨은 "엄마 관심 좀 가져줘"라는 신호는 못 본다.


동네 작은 식당 사장님 이야기를 해보자. 60대 초반 남성인데, 단골 손님 중에 유독 까다로운 아저씨가 있다고 했다. 음식에 대해서 이것저것 트집을 잡고,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하고, 가끔은 화를 내며 나가기도 한다. 처음엔 정말 짜증났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다는 거다. 그 아저씨가 혼자 산다는 걸.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 식당에서라도 말을 걸고 싶어한다는 걸. 트집을 잡는 게 아니라 관심을 끌고 싶어한다는 걸.

그 뒤로는 달라졌다고 했다. 그 아저씨가 불평을 해도 "오늘은 뭐가 마음에 안 드세요?"라고 웃으며 물어본다고 했다. 그러면 그 아저씨도 금세 풀어져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결국 그게 원하던 거였다는 거다. 음식이 문제가 아니라 외로움이 문제였던 거다.


살아남는 사랑의 조건


진짜 사랑은 시험을 받아도 무너지지 않는다. 아무리 공격받아도 살아남는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완벽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 실수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진짜 조건은 단 하나다.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화를 내도 되지만 다시 와서 사과해야 한다. 실망해도 되지만 다시 와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포기하고 싶어도 다시 와서 시도해야 한다.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이 결국 서연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서연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승민이 차갑게 굴어도, 거절해도, 상처 주는 말을 해도 끝까지 다가갔다. "나 정말 그때 편지 못 받았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계속 말했다. 승민의 차가운 반응에 상처받았을 텐데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승민의 마음을 열었다.

라라랜드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이 결국 헤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랑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있었기에 각자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진짜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성장이다. 상대방이 진짜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이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보라. 원망이 아니라 감사였다. 서로 때문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위니코트의 말대로 진짜 사랑은 '살아남는 사랑'이다. 아이가 엄마를 때리고, 소리지르고, 미워한다고 해도 엄마는 살아남아야 한다. 무너지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야 아이가 안전하다고 느낀다. '아, 이 사람은 내가 뭘 해도 떠나지 않는구나. 그럼 진짜 나를 보여줘도 되겠다.'

문구점을 운영하는 그 아주머니처럼 말이다. 50대 후반인데, 아들이 30이 넘도록 집에서 백수로 지낸다고 했다. 게임만 하고, 일은 안 하고, 가끔씩 용돈 달라고 손만 벌린다고 했다. 주변에서는 다 내쫓으라고 한다. 아들도 그걸 안다. 그래서 가끔 집 나가겠다고 협박도 하고, 엄마한테 화풀이도 한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포기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달라질 거야. 지금은 힘든 시기인 거야." 그렇게 믿고 있다.

주변에서는 바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진짜 사랑이다. 조건 없는 사랑. 성과 없어도, 보답 없어도, 고마워하지 않아도 계속하는 사랑. 그런 사랑 앞에서는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가면을 벗게 된다. 시험을 멈추게 된다. 진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왜? 안전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떠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다.

성귀자는 치료 결과를 이렇게 전한다. "그 다음해 벚꽃이 만개한 어느 봄날, 엄마 J씨에게서 한 통의 문자가 왔다"(성귀자, 2023: 205). 결국 아이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자퇴 대신 성장을 선택했다. 찜닭 시험을 통과한 엄마와 함께.

당신 주변에도 찜닭 같은 요구를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상한 부탁을 하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 원하는 건 그 요구 자체가 아니다. 바로 당신이다. 떠나지 않을 당신, 포기하지 않을 당신, 끝까지 함께할 당신 말이다. 그 신호를 놓치지 말자. 그게 바로 사랑이 가진 가장 강력한 치유력이다.


성귀자 외(2023). 모신엄마. 대구: 달구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