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홍종민 Dec 18. 2025 brunch_membership's
사람들은 자기 말에 밑줄을 긋는다
누군가 말을 할 때, 모든 단어가 같은 무게로 나오지 않는다. 어떤 단어는 힘을 주고, 어떤 단어는 빨리 지나가고, 어떤 단어는 웅얼거리듯 흘린다. 특정 부분에서 멈추고, 특정 부분은 반복한다. 이게 그 사람이 자기 말에 찍는 구두점이다.
글에서 마침표, 쉼표, 느낌표가 의미를 바꾸듯이, 말에서도 강세와 멈춤이 의미를 바꾼다. "나는 괜찮아"와 "나는... 괜찮아"는 다르다.
"별일 아니야"와 "별일 아니야!"는 다르다. 같은 단어인데 전혀 다른 뜻이 된다.
사람들이 자기 말에 찍는 구두점은 자기가 전달하고 싶은 의미와 일치한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힘을 준다.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빨리 넘긴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실제로 중요한 부분과, 그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다를 때가 많다.
진짜 중요한 건 오히려 웅얼거리며 지나간다. 말하기 불편하니까. 사소한 부분에 힘을 주고, 핵심은 슬쩍 흘린다. 당신이 그 구두점을 그대로 따라가면 속마음을 놓친다.
속마음을 터는 기술의 핵심이 여기 있다. 상대방이 찍은 구두점을 옮기는 거다. 상대방이 마침표를 찍은 곳에서 쉼표로 바꾼다. 상대방이 빨리 지나간 부분을 다시 불러온다. 상대방이 강조한 부분을 무시하고, 강조하지 않은 부분을 강조한다. 그러면 같은 말에서 전혀 다른 의미가 나온다.
마침표를 쉼표로 바꿔라
상대방이 말을 끝냈다. 마침표를 찍었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우리 동생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 마침표. 끝.
당신이 "그렇구나"라고 받으면 거기서 끝난다.
하지만 당신이 "흠?"이라고만 해보라.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상대방이 멈칫한다. 그러다 덧붙인다.
"사실 친구가 그런 말 한 적 있어. 자기는 동생이 너무 싫어서 죽여버리고 싶다고."
마침표가 쉼표로 바뀌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 뒤에 숨어 있던 게 나왔다. 죽이고 싶을 만큼 싫은 대상이 과연 중요하지 않은 존재인가? 아니다. 너무 중요하니까 부정하는 거다.
상대방이 "끝"이라고 선언한 지점에서 끝내지 마라. "흠?" "그래서?" "근데?" 이 한마디가 마침표를 쉼표로 바꾼다. 상대방이 닫으려던 문이 다시 열린다.
물론 무조건 밀어붙이라는 게 아니다. 상대방이 진짜 말하기 싫어하면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마침표를 찍어놓고 누군가 그걸 쉼표로 바꿔주길 기다린다. "더 물어봐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먼저 말하긴 좀 그래." 그 신호를 읽어라.
웅얼거리는 부분을 잡아라
사람들은 불편한 말을 웅얼거린다. 빨리 지나간다. 잘 안 들리게 말한다. 이게 신호다.
친구가 얘기를 하는데 어떤 부분에서 목소리가 작아진다. 발음이 뭉개진다. 속도가 빨라진다. 그 부분이 핵심이다. 말하기 불편한 거다. 그래서 슬쩍 넘기려는 거다.
"천천히 말해봐." "방금 뭐라고 했어?" "그 부분 다시 말해줄래?" 이렇게 요청하면 상대방은 처음에 당황한다. 대수롭지 않은 부분인데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다시 말하게 하면 다르게 나온다. 아까는 웅얼거렸는데 이번에는 또렷하게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도 그 말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다.
반대로, 사소한 주제에 대해서는 침착하게 말하다가 민감한 주제가 되면 갑자기 말을 쏟아내는 사람도 있다. 홍수처럼 말을 쏟아서 정작 중요한 내용을 흘려버린다. 빨리 지나가면 덜 중요해 보이니까. 이것도 같은 회피다.
속도가 갑자기 바뀌는 지점을 주목하라. 느려지든 빨라지든, 속도가 바뀌면 뭔가 있는 거다.
끊긴 문장을 이어라
"사실 나는 정말로... 어쨌든 요점은 말이야."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문장을 시작했다가 중간에 끊고, 전혀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 "정말로" 뒤에 뭐가 오려고 했는가? 그게 핵심이다. 말하려다 만 거다. 스스로 검열한 거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넘어간다. 상대방이 화제를 바꿨으니까 따라간다. 그러면 안 된다. "잠깐, 아까 '정말로' 뭐라고 하려고 했어?" 이렇게 다시 불러와야 한다.
상대방이 처음에는 "아, 그거? 별거 아니야"라고 한다. 별거 아니면 왜 중간에 끊었는가. 별거 아닌 건 끊을 이유가 없다. "별거 아니라고? 말해봐." 한 번 더 밀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문장을 짧게 끊어서 재구성한다. 말하기 방식 자체가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회피가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말하기 방식 전체에 회피가 스며들어 있는 거다. 늘 핵심을 비껴가는 습관.
끊긴 문장에는 이유가 있다. 원래 하려던 말이 불편했던 거다. 그 말을 살려내야 속마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