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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질문한다는 것

by 홍종민

질문이 대화를 죽인다


사람들은 질문을 많이 하면 대화를 잘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틀렸다. 질문이 대화를 죽이는 경우가 더 많다.


친구가 "요즘 힘들어"라고 했다. 당신은 묻는다. "왜? 회사 때문이야? 남자친구 때문이야? 건강 문제야?" 친구는 그중 하나를 고른다. "응, 회사 때문인 것 같아." 대화가 끝난다. 당신이 제시한 선택지 안에서 답을 골랐기 때문이다. 정작 친구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 안에 없었을 수도 있다.


질문이 상대방의 말을 가둬버린 거다. 그게 팩트다.


"요즘 힘들어"라고 했으면 "힘들어?"라고만 되물으면 된다. 그러면 친구가 알아서 풀어놓는다. 자기가 말하고 싶은 방향으로. 당신이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게 진짜 속마음이다.

질문은 짧을수록 좋다. 길게 물으면 상대방이 방금 자기가 뭘 말하려 했는지 잊어버린다. "그래서 그때 네가 느낀 감정이 정확히 뭐였어? 화가 났어? 서운했어? 아니면 그냥 허탈했어?"라고 물으면, 상대방 머릿속에서 자기 감정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단어들이 맴돈다. 흐름이 끊긴다.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할 때도 있다. 의아하다는 표정. 그것만으로 "더 말해봐"라는 신호가 된다. 침묵도 질문이다. 상대방이 말을 멈췄을 때 바로 말을 받지 않고 잠시 기다리면, 상대방이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낸다. 침묵을 견디지 못해서.

브루스 핑크는 이렇게 말했다. "분석가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처럼 가정해서라도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1]


이건 상담실에서만 통하는 기술이 아니다

.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

빨리 알아듣는 척하지 마라

.

못 알아들은 척해라

.

그래야 상대방이 더 말한다

.


상대방의 단어를 그대로 써라

누군가의 속마음을 끌어내고 싶으면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다. 상대방이 쓴 단어를 그대로 쓰는 거다. 번역하지 마라. 바꿔 말하지 마라.

친구가 "걔랑 잤어"라고 했다. 당신이 "사랑을 나눴구나"라고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친구가 속으로 생각한다. "사랑? 그게 무슨 사랑이야." 하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는다. 귀찮으니까.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 당신이 "사랑을 나눴다"고 번역하는 순간, 친구의 경험이 왜곡됐다.

단어는 서로 대체 가능한 동등물이 아니다. "잤다"와 "사랑을 나눴다"는 다르다. "짜증난다"와 "화난다"는 다르다. "좀 그래"와 "싫어"는 다르다. 상대방이 고른 단어에는 이유가 있다. 그 단어를 그대로 돌려주면 상대방은 자기 말이 제대로 들렸다고 느낀다. 그래야 더 깊은 이야기를 한다.

상대방이 거친 표현을 쓸 때가 있다. 욕을 섞을 때도 있다. 당신이 불편해한다. 점잖은 표현으로 바꾸고 싶어진다. 그러면 안 된다. 상대방이 "그 XX 같은 놈"이라고 했으면 "그 사람"이라고 순화하지 마라. 상대방이 쓴 그 표현을 그대로 써라. "그 XX 같은 놈이 뭘 했는데?"라고.

당신이 그 표현을 피하면 상대방은 안다. "이 사람은 이런 얘기 듣기 싫어하는구나." 그 순간 상대방은 말을 정제하기 시작한다. 속마음이 아니라 당신이 듣기 편한 말을 한다. 대화가 표면에 머문다.

핑크는 이런 지적도 했다. "분석가는 의미가 명백해 보이는 환자의 말에서도 어떤 중요한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이에 대해 환자가 당황스러워하더라도 그것을 그만두어선 안 된다"[2]


상대방이 무심코 던진 말

,

별것 아닌 것 같은 표현

.

거기에 진짜가 숨어 있다

.

그 단어를 그대로 되물어라

. "XX 같다고?

뭐가XX 같은 건데?"


넘어가지 마라

사람들은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한다. 말하기 싫은 건 슬쩍 넘어간다. 의식적으로 그럴 때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그럴 때도 있다. 어떤 주제가 나왔다가 갑자기 다른 얘기로 넘어간다. 뭔가 불편한 거다.

당신은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 주제로 돌아가야 한다. 상대방이 꺼리더라도.

"아, 그건 됐고" 하면서 넘어가려 할 때. 그게 핵심이다. "됐다"는 말은 "이 얘기 하기 싫다"는 뜻이다. 하기 싫은 얘기가 대개 중요한 얘기다.

물론 강제로 캐물으면 안 된다. 상대방이 진짜 말하고 싶지 않으면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그 얘기 듣고 싶어"라는 신호는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은 "이 사람은 그 얘기에 관심 없구나"라고 결론 내린다. 다시는 그 주제를 꺼내지 않는다.

"그건 됐고"라고 했을 때, "응, 알겠어"라고 넘어가지 마라. 대신 "알겠어. 근데 나중에 말하고 싶어지면 말해줘"라고 해라. 그 한마디가 문을 열어둔다.

당신 자신도 돌아봐라. 상대방이 불편한 얘기를 꺼내려 하면 당신도 피하고 싶어진다. 무거운 얘기 듣기 싫다. 그냥 가볍게 넘어가고 싶다. 이게 당신의 저항이다. 상대방의 속마음을 듣고 싶다면서 정작 당신이 피하는 거다.

누군가 "사실 요즘..." 하다가 말끝을 흐린다. 당신이 "뭐?"라고 안 물으면 그냥 넘어간다. "아니야, 별거 아니야"라고 하면서. 별거 아닌 게 아니다. 말하려다 만 건 대개 중요한 거다. "뭐? 말해봐"라고 한 번만 더 물어라. 그게 속마음을 여는 열쇠다.


구체적으로 물어라

어떤 상황에서는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상대방이 혼란스러워서 자기 경험을 말로 풀어내지 못할 때. 이때는 질문으로 실마리를 잡아줘야 한다.

"뭔가 이상했어"라고 한다. "뭐가 이상했는데?"라고 물으면 "그냥... 이상했어"라고 답한다. 막연하다. 이럴 때는 더 작은 단위로 물어야 한다. "그때 걔가 뭐라고 했어?" "그 말 듣고 네가 뭘 했어?" "그다음엔?" 장면을 하나씩 풀어가듯이.

"기분 나빴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기분 나빴다"는 너무 넓다. "뭐가 기분 나빴어? 걔가 한 말? 표정? 말투?" 이렇게 좁혀가면 상대방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막연했던 감정이 구체적인 기억과 연결된다.

단, 모호한 단어는 쓰지 마라. "상처받았어?"라고 물으면 상대방 머릿속에 "상처"라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끼어든다. 실제로 느낀 것과 다를 수 있다. 대신 "그때 어땠어?"라고 열어두는 게 낫다. 상대방이 자기 언어로 표현하게 해라.

이름과 시기를 기억하라

사람들이 의외로 놓치는 게 있다. 이름. 시기.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지만 여기서 연결고리가 나온다.

친구가 새 남자친구 얘기를 한다. 이름이 "재민"이다. 몇 달 전에 친구 아버지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 이름도 "재민"이었다. 우연인가? 우연이 아닐 수 있다. 물어볼 만하다. "어, 네 아버지 이름도 재민 아니었어?"

시기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그때 완전히 달라졌어"라고 한다. "그때"가 언제인지 물어라. "중학교 때"라고 한다. 며칠 전에 "중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고 했던 게 떠오른다. 두 사건이 겹친다. "그때 부모님 이혼하신 거랑 같은 시기야?"라고 물으면 친구가 처음으로 두 사건을 연결해서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사건들을 따로따로 기억한다. 연결하지 않는다. 당신이 연결해줄 수 있다. 그러려면 상대방이 말한 이름과 시기를 기억해야 한다.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원하는 걸 절대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중학교 때 그렇게 결심했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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