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미술에는 젬병이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딱 질색이었다. 나름 우등생이었던(?) 초등학교 시절에도 미술은 실기에서 까먹는 점수를 필기시험으로 보완하는 수준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실기에서 양(수우미양가 체계에서..)을 받는 대참사를 겪기도 했다. 이후에도 수십 년간 그림에 대해선 아예 관심이 없었다. 약 15년 전 런던에 2년 간 거주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 유명한 National Gallery에 딱 한 번 가본 수준이었으니. 그렇게 그림과는 담을 쌓은 인생이었다.
예전에 직장에 다닐 때 일이다. 당시 업무가 너무 많고 힘들어서 하루하루를 사는 게 아니라 억지로 버티는 수준이었다. 낙이라고는 매월 정해진 날짜에 입금되는 월급으로 아이들 피자랑 치킨 사주는 게 유일했다. 마음 속으로는 늘 사표를 쓰고 다니던 그 때 우연히 서울역 작은 서점에 들렀다가 표지가 특이한 책 한권을 발견했다. 보통은 겉장에 제목이 쓰여 있는데 이 책은 글씨는 없고 꽃밭 그림만 있었다. 특이해서 옆에 쓰인 제목을 보니 <그림의 힘>이란 책이었다. 머리말을 읽어봤다. 그림이 사람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요상한 이야기를 해댄다. '대체 뭔 소리야' 하는 심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내 인생에 그림을 초대하는 순간이었다. 미술이라면 질색을 했고, 런던의 그 유명한 국립미술관도 광장에서 사자상 배경으로 사진이나 찍던 나였는데.
크뢸러-뮐러 미술관에서 원본 촬영
첫번째 그림이 바로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였다. 작품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그림을 한동안 뚫어지게 봤다. 일단은 저 까페에 앉아 맥주 한 잔 마시며 멍때리고 싶은 마음이 제일 먼저 들었다. 밥 먹을 시간도, 잠 자는 시간도 부족한 생활을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모든 테이블이 꽉 찼더라면 보는 사람도 답답했을텐데 다행히 앞에 빈 자리도 많고 여유로와 보였다. 그 다음에는 색깔의 대조가 보였다. 까페의 짙은 노란색과 밤하늘의 짙은 파란색이 완연하게 대비되면서 까페가 더 밝아보였다. 게다가 길바닥은 운치있는 자갈길(cobbled street)이었다. 바로 책을 구입해서 기차안에서 읽어 내려갔다. 책에 수록된 그림들은 대부분 초면이었지만 읽는 내내 편안하고 좋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내가 그림에 관한책을 읽다니!
한참 후의 일이지만 나중에 운 좋게도 네덜란드 크뢸러-뮐러 미술관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림과는 전혀 친하지 않던 중년 아저씨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바로 그 <밤의 카페 테라스>가 있는 미술관이다. 다른 작품들 다 제쳐놓고 달려가다시피 해서 실물을 영접했다. 가장 좋아하는 축구선수 Lionel Messi를 실제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수년 간 가장 좋아했던 작품을 바로 눈 앞에서 마주했던 그 순간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책에서 보던 것보다 밤하늘의 파란색이 더욱 선명해서 노란색과의 대조가 훨씬 강했다. 카피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두터웃 붓터치도 상상 이상이었다. 하늘의 별은 물감을 두텁게 찍어 눌러서 표현했고 카페 앞 나뭇잎도 여러 겹의 물감 덩어리였다. 아우라 자체가 옆에 있는 다른 작품들을 압도했다. 미술관 측에서도 여기에 소장된 고흐의 작품들 중 이것이 원탑이라 생각했는지 제일 중앙에 배치해놨다. 마치 가장 예쁜 사람을 센터에 세우는 걸그룹처럼. 지금까지 적지 않은 작품들을 실제로 감상했지만 <밤의 카페 테라스>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무 확대(좌), 하늘 확대(우)
요새도 시간날 때마다 그림에 관한 책을 보고 미술관에도 자주 다닌다. '세계 명화'라고 하는 작품들은 자세한 감상포인트까지는 몰라도 일단 누가 그린 것인지 정도까진 안다. 일반인은 다 이렇게 시작한다. 전 국민에게 기쁨과 감동을 줬던 2002년 월드컵 때도 축구룰과 전술까지 자세히 분석하면서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장삼이사들은 그냥 경기가 재미있고 우리가 골을 넣어서 이기면 그걸로 만족한다. 그렇게 축구를 자주 보다가 더 재미있어지면 룰과 포메이션을 공부하면서 더 깊이 즐기는 것이고.
그림도 흥미를 느끼는 게 우선이다. 소수의 매니아들이 작품에 감동받고 열광할 때 무식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억지로 아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일 필요는 없다. 룰은 나중에 배워도 된다. 자꾸 보고 흥미를 가지는 게 우선이다. 나는 일단 흥미라는 첫번째 허들은 넘은 것 같다.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하게 됐으니까. 전문가의 시선이 아니라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한 '쌩초보'로서 그림을 보는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다. 특히 문화적 소양이 부족하고 무식한 티 안내려고 억지 웃음 지었던 경험이 있는 우리 동지들과 함께. 설령 내 감상포인트가 전문가들의 그것과 다르면 또 어떤가. 나만의 방식으로 느끼고 그 작품이 내 삶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 되면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