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스토리가 담긴 그림들을 보다 보니 예전에 교회에 다니던 때가 종종 떠오른다. 보통 예배시작이 11시인데 10분 전에 도착해도 앞쪽 두어 줄은 이미 만석이었다. 주로 할머니들이었다. 그 분들은 거의 30분 전에 오셔서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혼자 흥얼거리며 예배를 기다리시곤 했다. 그 땐 교회짬바가 오래되면 저절로 신앙심이 깊어지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도 할머니들은 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나 보다. 30년 구력의 권사님 같은 한 할머니가 식탁 앞에서 신실한 표정으로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다. 메뉴는 빵, 연어구이, 치즈, 수프다. 방금 전까지 책을 읽고 계셨는지 왼쪽 벽에는 책이 펼쳐진 채로 놓여 있다. 아마 성경이겠지. 옆에 놓여 있는 빨간색 모래시계는 아마 세상의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곧 하나님 곁으로 갈 운명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 같다.
빛이 할머니를 정면으로 비추며 보여주는 얼굴의 주름, 검소한 옷차림과 집안 내부, 그리고 간소한 식탁 메뉴가 신교도의 청빈한 생활상을 보여준다. 두 손 모아 간절히 드리는 감사기도에서 물질적으로는 검소하지만 영적으로는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얼마나 기도에 집중하셨는지 고양이가 연어구이 냄새를 맡고 식탁보를 끌어내리려 하는 것도 모르신다. Rembrandt 애제자답게 스승의 전매특허인 '빛과 그림자의 대조'를 여기서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Nicolaes Maes <Old Woman Dozing>. 벨기에 왕립미술관.
위에 식사기도 하는 할머니랑 똑같이 생기셨다. 같은 모델을 썼나 보다. 두 작품 모두 1656년에 그려졌는데 아마 스토리상 이 작품이 나중에 나온 거 같다.
할머니가 저녁 드시고 방에 오셔서 성경을 읽다가 졸고 계신다. 이 때는 밤에 달리 할 게 없었으니 종교활동 하시다가 깜박 잠이 드셨나 보다. 테이블 위에 있는 성경책에는 AMOS 라고 쓰여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을 다룬 구약성경 아모스서다. 당시 사람들은 사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이 매우 커서 '심판' 관련한 이야기를 주로 읽지 않았을까. 여기서도 세상 시간의 흐름을 빨간 모래시계로 표현하고 있다.
Nicolaes Maes보다 한 세대 위 화가들도 같은 테마로(제목도 같음) 작품을 남겼다. 당시에도 할머니들이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셨나 보다.
Jan Lievens가 그린 할머니는 사진을 찍어 놓은 것처럼 사실적이다. 진지한 표정은 물론, 얼굴 주름과 손등의 핏줄까지 진짜같다. 왼쪽에서 비치는 빛과 반대편의 그림자의 조화가 할머니를 연극무대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다. 카라바조 화풍을 배운 거 같다.
Gerard Dou 작품 속 할머니는 값비싼 모피를 두르셨다. 부잣집 할머니인가 보다. 설명에 따르면 그림을 곁들인 이 페이지는 누가복음 19장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림 속에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세관장)가 보인다. 이 그림 역시 세밀한 붓터치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손등의 주름, 모피 터럭, 할머니 눈가의 잔주름 등이 매우 정교하다.
Hieronymus Bos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중 지옥도. 구글 검색.
그림 속 할머니들이 성경을 손에서 놓지 못한 건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일 것이다. 아마 당시 사람들은 기존 화가들이 그려 놓은 상상 속의 지옥을 떠올리며 늘 공포 속에 살았을 것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은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문당하고, 칼에 찔리고, 괴물에게 잡아 먹히고..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말년에 가까울수록 신앙생활을 더더욱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문득 생각해 본다. 나중에 세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나는 그림 속 할머니들처럼 사후세계를 걱정하면서 종교에 심취해 있고 싶지는 않다. 대신 언젠가 흙으로 돌아감을 쿨하게 인정하고 마지막 날까지 촌음을 아껴가며 재미있게 보내고 싶다. 그 때쯤엔 <생초보 할아버지의 미술관 도전기-1000> 정도 쓰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