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은우 옆에선 모두가 '오징어'
내가 잘나가는 사람인가? 내가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가 정답이다. 비교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잘나가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찐따가 되기도 한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나도 나름 괜찮은데 주변에 나보다 우월한 애들만 있어서 졸지에 '오징어'가 될 때는 진짜 억울하다. 마치 대한민국도 군사력이 꽤 높은 순위에 있는데 하필 주변에 러시아, 중국, 일본, 북한이 있어 우리가 얼마나 강하고 대단한 나라인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명화들 중에도 비슷한 맥락에서 안타까운 작품들이 몇 개 있다. 비유하자면 어떤 아가씨가 꽤 미인인데 하필 카리나가 짝궁인 바람에 갑자기 평범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격이다. 이런 작품 세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다른 예도 많겠지만 내가 직접 본 작품 중에서 골라봤다.
1.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의 <가나안의 혼인잔치>
개인적으로 가장 안습인 작품이다. 전교 1등도 아니고 전세계 1등 <모나리자>와 같은 방에 걸려 있는 바람에 '쩌리' 대우를 받고 있다. 차라리 <모나리자> 옆에 있으면 보는 김에 같이 볼텐데 하필 정반대쪽 벽에 걸려 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모나리자> 앞에서 후다닥 인증샷만 찍고 이 방을 떠나기 때문에 <가나안의 혼인잔치>가 있는 줄도 모른다. 이 친구도 전교권에 드는 '공부 잘하는 애'인데 말이다.
<가나안의 혼인잔치>는 일단 사이즈에서부터 50%는 먹고 들어간다(9.94m*6.77m). 한쪽 벽면 전체를 채울 정도로 크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회화 작품 중 가장 크다고 한다. 이 큰 그림을 균형감 있게 그린 자체만으로도 화가를 인정해줘야 한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가나안 동네의 한 결혼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항아리의 물을 포도주로 바꿔놓으신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속 배경이 특이하다. 성경 내용상으로는 약 2천년 전 중동지방이 그 배경이어야 하는데 그림에 나오는 집은 이탈리아 귀족들이 살 법한 고급저택이다. 아마 화가 베로네세가 베네치아 출신이어서 그 동네 잘사는 집을 배경으로 해놨나 보다.
구도도 안정적이다. 일단 예수님이 정중앙에 있어 좌우대칭이 맞아 떨어지고 하단의 악사들, 중앙에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상단에 테라스에 있는 사람들 배치 또한 안정적이다. 색채도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계열로 다채롭다. 중동의 칙칙한 모래 색깔 대신 알록달록한 색채가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 눈이 더 즐겁다. 하여간 비전문가가 봐도 이 큰 그림을 밝고 균형감 있게 잘 그려놨다. 그런데 하필 같은 방에 '차은우'가 있어 대우를 제대로 못받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2.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델프트 풍경>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인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Mauritshuis 미술관 같은 방에 걸려 있다. 이 작품도 대표선수 맞은편에 걸려 있어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기고 있다. 하지만 전시된 방 크기가 워낙 작아서 <가나안의 혼인잔치>같은 홀대를 받는 것까지는 아니라 다행이다. 예쁜 소녀 그림 앞에서 인증샷 하나 찍고 빙 둘러서 보다 보면 이 작품도 눈에 들어온다.
<델프트 풍경>은 풍경화를 거의 그리지 않은 베르메르가 그렸다는 것만으로도 진귀하지만,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로 인해 더 유명해진 작품이다. 프루스트가 <델프트 풍경>을 감상하고 나서 친구에게 쓴 편지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옛날 사진이나 그림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라는 도시의 정경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저 빨간지붕 건물 뒤 골목길로 베르메르가 걸어가는 모습도 상상해 봤다.
먹구름 사이로 오른쪽에서 햇살이 다시 비치고 있고 저 멀리엔 날이 개어서 구름 색깔도 달라져 있다. 왼쪽에 있는 건물 지붕은 붉은색, 오른쪽 건물 지붕은 푸른색, 그리고 햇살을 받은 건물들은 노란색 계열로 채색되어 있다. 게다가 강물에 비친 건물의 그림자도 매우 세밀하고 정교하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한 '가장 아름다운'까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것에는 100% 동의한다.
3.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의 <캉캉춤>
이 작품은 네덜란드 크뢸러-뮐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네덜란드에 살 때 여기에 너댓 번 갔었는데 두번째 갔을 때에야 <캉캉춤>이 있는 걸 알았다. 이 미술관에는 고흐의 역작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도 고흐 작품들에 집중하느라 나머지 '떨거지(?)'들에까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밤의 테라스>를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느라 시간을 많이 쓰기도 했고.
조르주 쇠라의 <캉캉춤>은 점묘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점묘법(Pointillism)이란 팔레트에서 색을 섞어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작은 원색의 점을 무수히 찍어서 보는 사람의 눈에서 색이 섞이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기법이다. 보통 점묘법 작품들을 보면 시간이 정지되고 정적인 느낌을 받는데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춤의 역동성이 그대로 느껴지고 무용수들과 지휘자의 표정도 보인다. 쇠라 덕분에 19세기 후반 파리지앵들이 유흥을 즐기는 것까지 구경지 엿볼 수 있었던 건 덤으로 따라온 즐거움이다.
쇠라가 점묘법으로 그린 다른 작품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같은 경우 무려 2년간 점을 찍어서 완성했다고 한다. 아마 <캉캉춤>도 그에 못지 않은 시간과 열정을 쏟은 작품일 것이다. 그런데 대중성에서 고흐 작품들에 밀렸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크뢸러-뮐러 미술관에 <캉캉춤>이 있는 지도 모르는 것같다. 나도 처음엔 그랬는데 뭐.
미술사 책에 나오는 대가들의 세 작품을 재미삼아 '차은우' 때문에 '오징어'가 된 작품들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직접 그 앞에서 작품을 바라볼 때 느꼈던 압도적인 아우라는 아직 잊을 수 없다. 일단 사이즈만으로도 나를 굴복시켰던 <가나안의 혼인잔치>, 17세기 델프트라는 역사성으로 감동을 준 <델프트 풍경>, 그리고 점묘법이라는 새롭고 참신한 기법으로 교양의 수준을 업그레이드 해준 <캉캉춤> 모두 감동과 감사의 대상이다.
국내외 어느 미술관을 가든 우리가 한 가지 늘 명심하면 좋겠다. 책에 자주 나오는 유명한 작품들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우리에게 행복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선수들이 미술관 구석구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