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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캐슬 Jul 09. 2024

사랑은 상처를 허락한다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를 읽고

 “OK.”

 셀 수 없이 돌려본 가장 좋아하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마지막 대사다. 영화속 사람들은 병원에서 괴로운 기억을 지울 수 있다. 다소 다혈질의 여자 주인공 클레멘타인은 남자 주인공 조엘과 헤어지고 그와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그러자 남자 주인공 조엘 역시 그녀와 사랑했던 기억을 지우고자 병원에 방문한다. 조엘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녀와의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클레멘타인과 사랑했던 기억을 지우고자 한 것을 후회하나 결국 그들의 머릿속에서 모든 기억은 깨끗하게 지워지고 만다. 하지만 그들은 우연히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한 사건을 계기로 병원을 방문했을 때 상대방을 험담했던 자료들을 듣는다. 서로를 끔찍이도 싫어했단 사실에 좌절한 클레멘타인이 조엘을 향해 소리친다.


“당신은 날 거슬려 할 거고 난 당신을 지루해 할 거야!”


조엘은 아무 상관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다.


“OK.”


그제야 클레멘타인의 굳은 표정이 풀어지고 웃음을 터트리며 영화는 끝이 난다. 저마다의 해석은 다를 수 있겠지만 영화가 “사랑은 상처를 동반한다.”는 메시지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은 상처를 허락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는 작중 인물들이 지은을 통해 상처를 대면함으로써 용서와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를 엮었다. “사랑은 상처를 허락한다.”는 메시지가 작품 전반을 꿰뚫는 게 아니란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이것에 집중하고 싶었다. 다른 무엇보다 이것이 필요하다 생각했기에.     


 교직에 있다 보면 해가 갈수록 교실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먼지보다 하찮은 것에도 시시비비를 따지고 조그마한 손해를 감수할 줄 모른다. 티끌만 치라도 피해를 보게 되면 꼭 사과를 받아야 하나 명백한 잘못에도 지지부진한 변명만 늘어놓기도 한다. 가만 들어보면 꼭 세상을 자기 혼자 살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이나 실상은 늘 타인의 주변을 기웃거리며 관심을 갈구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으나 그 사람이 늘 내 입맛대로 행동하고 움직이길 원한다. 공동체가 항상 득이 되길 바라나 한순간도 나에게 미미한 피해도 입히지 않길 원한다. 가만 보고 있으면 정말 코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에 이를 때가 많다.     


 타인과 함께 지내지 못하는 아이들의 행동양식의 기저에는 부모님의 ‘잘못된’, ‘굉장히 이기적인 사랑’이 깔린 경우가 많다. 자기 자식이 귀한 것이야 어느 부모가 그렇지 않겠느냐느니 만 자기 자식만큼이나 다른 자식 또한 귀하디 귀한 아이다. 그런데 그것을 간과하고 다른 아이들 아니 자기 아이를 제외한 모두를 게임 속 NPC(플레이어가 아닌 시스템 속 인물)쯤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감정이 있는 타인에게 어떻게 저렇게 무례하고 경우가 없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들 때가 많은데, 타인을 자기 자식을 위한 성장 도구쯤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알게 된 후로 그제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타인 또한 자신의 아이를 그 정도로 여기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왜 조금도 생각하지 못할까, 정말 답답할 때가 많다.     


 그런 아이들은 보통 사소한 것부터 거대한 것까지 어떤 분쟁에든 끼어 항상 타인과 갈등을 겪는데 공동체 의식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요. 다른 아이들마저 예민하고 날카롭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줄기차게 남에게 던졌던 험담과 칼날들이 돌고 돌아 자신에게 박힐 때조차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일지 모름에도 남의 작은 흠이라도 찾으려 노력하고 어떻게 하면 남의 잘못을 크게 내 잘못은 작게 보이게 만들지 고민한다. 보통 거기까지 가게 되면 중재와 타협, 반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시시비비, 징계만이 남아 지겹도록, 어찌 보면 정말 모래 알갱이같이 사소한 일 때문에 갖가지 미사여구를 써가며 끝도 없이 오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교실은 어느새 공동체의 장이라기보다 법적 분쟁의 장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제껏 책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교직에서 느낀 점을 지겹도록 나열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책이 사랑과 관용, 즉 타인과 함께 사는 방법에 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희는 희재와의 사랑의 기억 지울 기회가, 연자 씨는 재하와 관련된 가슴 아픈 추억을 지울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연희는 희재와의 기억을 조금 옅게 기억할 것을, 연자 씨는 엉클어진 마음을 조금 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괴로웠던 상처조차도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사람과 관련된 것이라면 쓰리지만 받아들이고자 그들은 노력했다.     


 연희의 연인인 희재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참 부족한 남자다. 허풍과 허언이 심하고 끈기가 없으며 결국엔 연희를 배신해 상처 입힌다. 연희는 오랜 시간 연인의 배신으로 괴로워했으나 지은을 통해 상처를 마주하고 받아들일 힘을 얻는다. 그녀는 괴로웠던 기억에 가려진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며 그와의 기억을 가슴속에 남겨둔다. 나는 연희의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헌신하고 그 사람이 나를 상처 입히든 말든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고의적으로 큰 피해를 지속적으로 준다면 어떻게 그와 함께 하겠는가? 다만 함께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상처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만약 연희가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희재와의 관계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희재와의 소중한 추억을 가질 수 있었을까? 손가락이 스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마주 잡게 될 때 느끼는 간질간질한 감정을, 반쯤 고장 난 채로 축축 늘어져 퇴근하는 길에 마중 나온 연인을 만났을 때 느끼는 반가움을,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즐거운 감정을 과연 느낄 수 있었을까? 단언하건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혼자 행동한다면 손해 볼 것이 정말 하나도 없다. 모든 판단과 결과는 나에게서 기인한 것이고 득을 보는 것도 책임을 지는 것도 결국 나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고자 한다면, 타인과의 연결을 원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세상 모든 것을 깔끔하게 반으로 쪼갤 수 없기 때문에 타인과의 만남에서 시간, 체력, 돈, 감정 등을 완벽하게 조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조금씩 피해를 입히기도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 것들은 당연하게 여기며 실컷 혜택을 누리다 자기가 피해 입을 때만 목에 핏대를 세우고 열변을 토한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소음으로 그치게 될 수밖에 없다. 공동체에선 행복과 고통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타인과 함께할 수 없다. 함께해서는 안 된다.     


 조금은 다른 맥락으로 재하의 엄마 연자씨는 불우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뛰어난 우등생임에도 집안 형편으로 인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두 집 살림을 하는 남자를 만나 재하를 홀로 키워내야만 했다. 재능이 충만한 사람임에도 자신의 역량을 펼쳐볼 기회 따윈 없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아이를 집에 가두어 놓고 직장으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던, 시련과 고통으로 가득 찬 삶에 그녀는 인생을 괴로움의 다른 이름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순을 만나고 재하를 길러낸 후, 시간이 지나 깨닫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을 지나왔기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인생은 때때로 전세를 낸 듯 홀로 버스를 타게 되거나, 지각했다고 생각하며 성급히 출근한 채비를 하다 주말임을 깨닫게 되는, 그런 작고 소소한 행복들로 가득 차 있음을. 그녀는 지은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그녀의 삶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채비를 하고 있었다.     


 관용을 베푸는 것은 너그러이 받아들일 줄 알고 용서하는 것, 상처에 새살이 돋게 하는 것과 같다. 근육이 상처를 입으면 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게 성장하듯 사람의 마음 또한 같다. 수없이 상처받고 눈물짓는 일이 있다 해도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용서할 수 있다면, 용서하지 못해 마음의 상처가 곪고 곪아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사람이 아닌 더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조금씩 성장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고 살아갈 순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처를 이겨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비단 교실 내 학생이나 학부모뿐만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사랑과 관용을 베풀며 살자고.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한번 제고하고 기꺼이 상처를 감수하고 타인을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혐오와 비난 따위가 아닌 올바른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다음 세대에 넘겨줄 수 있는 훌륭한 어른이 되자고. 나 또한 많이 부족하지만 함께 노력해 보자고.     


 언젠가 따스한 마음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가 오길 바란다. 사랑으로 가득 차 부족한 자들을 마땅히 보듬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 그때가 되면, 그날이 오면 나도 연희처럼, 연자 씨처럼 내게는 너무나 버거웠던 시간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사로서 자신의 나약함에 눈물지었던 밤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통감하고 무력함에 좌절했던 날도, 타인을 미워하는 내 모습에 혐오감을 느꼈던 순간도 조금은 덜 아프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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