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장성과 로마의 가도(9)

수평방향의 가도

by going solo

3) 결론

(1) 가도의 본질

가도는 제국 통치자들의 최우선 과제였던 제국의 안전 보장이라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채택된 로마 통치세력의 전략이었다. 정복지에 주둔군을 상주시키지 않는 패자에 대한 로마의 전통적인 통치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유사시에 군단의 신속한 이동이 절대적 필요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가도는 방어용이며 동시에 공격도 용이하게 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형 전략의 취약점은 아군의 공격 혹은 방어를 용이하게 하는 것과 비례하여 적의 내습도 쉽게 허용될 우려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명한 허점을 가진 로마가도를 속주를 포함한 제국의 전역에 8만 킬로미터를 그물처럼 연결한 로마인들의 진정한 저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합리성이 바탕에 깔린 ‘힘의 우위’다. 그러한 로마제국의 합리성을 로마인이 건설한 가도가 상징한다.


(2) 로마제국 정신의 핵심 키워드- '패자 동화 노선'

기원전 58년에서 51년까지 8년간의 갈리아 지역 정복전쟁기록을 담은 '갈리아 전쟁기'는 로마군 수장이었던 카이사르가 직접 기록한 전쟁기이다. 그중 8권은 사실상 최후 결전이었던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갈리아연합군 총사령관 베르킨게토릭스를 상대로 최종 승리한 카이사르의 전후 처리에 대해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약소 부족까지 합하면 거의 100개에 이르는 부족이 난립하여 지휘계통이 단일화되지 않았던 갈리아에 대한 전후 처리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중소 부족을 포함한 갈리아의 모든 부족에게 내정의 자치를 인정한다.

-사제, 기사, 평민, 노예로 나뉘어 있는 갈리아의 사회제도는 그대로 유지한다.*


이상과 같이 매우 온건한 전후 처리 지침에 따라 갈리아 부족들은 각각의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로마 지배권에 편입되었다. 로마인은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정복지 갈리아에 로마식 도시를 건설하지 않았다. 각 부족의 수도나 로마를 상대로 하는 전쟁의 본거지였던 지역 또한 로마의 패권하에 편입된 뒤에도 계속 중요 도시로 존속했다. 로마인의 사회간접자본을 상징하는 로마식 가도도 이런 도시들을 그물처럼 잇는 도로망으로 연결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로마화 하려는 의도를 구체화하기 위한 정책을 주도면밀하게 진행해 갔는데 로마가 늘 쓰는 방식대로 부족의 유력자의 자제들을 수도 로마나 선진 속주로 보내 공부시켰다. 형식상 볼모이지만 체재국의 가정에서 생활하는 일종의 민박 유학생이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그들 중에서 선별하여 원로원 의석을 제공하고 율리우스라는 씨족 이름을 주기까지 했다.


또한, 로마에는 전문 사제 계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아 전쟁 중 항상 반로마 운동의 발화점이었던 사제들에 대해서는 전후 처리대상에 포함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갈리아의 종교, 문화, 교육을 갈리아인 자신에게 맡긴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통상장려나 광산 개발을 촉진하여 경제를 진흥시키고자 하였으며 감세정책까지 실시하였다. 패자였던 갈리아는 능동적으로 로마화에 가담하여 제국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로마에 등을 돌리지 않았다.


갈리아의 로마화 과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국 통치에 있어서 최우선적인 전제는 ‘힘의 우위’다. 로마 가도가 상징하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군사력은 다민족, 다인종에 대한 개방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러한 개방 정신이 패자에 대한 자발적인 동화로 이어졌다.




*로마인 이야기 4, 율리우스 카이사르 (上)/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참고자료

1.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 줄리아 로벨, 웅진 지식하우스

2. 로마인 이야기 4- 율리우스 카이사르 上, 下.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3. 로마인 이야기 10- 모든 길은 로마로 통 한다.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