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비료 푸대를 타던 소녀가 건네는 겨울 한 조각

by 혜솔 황보영



영하 15도의 겨울, 아이들은 추위보다 온몸으로 먼저 말한다.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는 발걸음,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떨림, 몸이 먼저 계절을 받아들이는 순간들로 아이들은 비로소 겨울을 통과한다.


어린이집에서 아직 어린 영유아들을 데리고 썰매장에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지, 혹시 넘어져 다치지는 않을지. 안전과 건강이 늘 우선인 영아 보육의 현장에서 원장의 고민은 늘 얼음판 위를 걷듯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일주일 전부터 아이들에게 썰매장 이야기를 해 두었기에, 아이들의 눈동자는 이미 기대와 설렘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매일 아이들의 얼굴을 살피며, 바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제발, 내일은 아이들에게 이 겨울을 허락해 주소서.


금요일 아침, 다행히 바람이 잦아들었다. "썰매장에 가자." 그 한마디에 음악 활동을 하던 아이들의 몸이 먼저 들썩였다. 방한복을 챙겨 입는 아이들의 얼굴에 번진 설렘을 보며 나는 안도했다. 사실 일주일간 아이들이 투정을 부릴 때마다 "그러면 썰매장 못 가."라는 말로 아이들을 달래기도 했다. 교육적으로 정답은 아닐지 모르나, 그만큼 아이들이 이 하루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지 알기에 내뱉을 수 있었던 고백 같은 협박이었다.


썰매장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얼음 위로 올라갔다. 썰매를 꺼내기도 전에 아이들은 이미 얼음 위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깔깔거리는 웃음이 얼음 위에서 튀어 올랐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긴 고민과 걱정은 모두 답을 얻은 듯 흩어졌다.


아이를 품에 안고 썰매에 몸을 실었다. 내 품에 쏙 들어온 아이의 온기를 느끼며 함께 얼음 위를 미끄러지던 순간, 문득 아주 오래된 나의 겨울 하나가 그 속도감을 타고 선명하게 밀려왔다. 썰매를 끌어주는 손끝에 힘을 실을 때마다, 혹은 아이의 웃음소리에 맞춰 발을 구를 때마다 장갑 너머로 어린 시절의 설렘이 겹쳐졌다. 나는 지금 아이들을 태워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 안의 어린 소녀를 달래주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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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시절에 썰매를 마음껏 탈 수 없었다. 썰매를 만들어 줄 사람이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빠도 없었고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먼 서울에 계셨다. 다른 아이들이 할아버지나 아버지, 혹은 오빠의 손에서 태어난 튼튼한 나무 썰매를 탈 때, 나는 그 곁에서 부러운 눈을 감추며 비료 푸대를 집어 들었다.


눈 쌓인 언덕 위에 비닐을 깔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그래도 정말 재미있었다. 방한복도 장갑도 부실해 손발이 꽁꽁 얼고 콧물이 줄줄 흘렀지만, 논바닥 얼음 위에서 지치도록 놀던 그 시절. 늘 마음 한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었기에, 더 오래 남아 있는 나의 가장 아름답고 따뜻했던 기억들.


그 시절 비료 푸대 위에서 느꼈던 짜릿한 감각이 지금 아이를 안고 썰매를 끄는 내 손끝에 그대로 전해진다. "원장님은 지금도 아이 같아요."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아이 한 명 한 명을 품에 안고 달릴 때마다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 통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썰매장은 동네 아이들을 위해 한 어른의 마음에서 시작된 공간이었다. 몸을 녹일 수 있는 하우스와 난로, 따뜻한 간식. 공간 곳곳에는 아이를 먼저 생각한 어른들의 자상한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아이들의 썰매를 힘차게 끌어 주셨고 아이들은 맑은 목소리로 응답했다.


"빨리 달리면 무서워요. 천천히 달려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우리는 다시 속도를 늦추었다. 아이의 마음에 맞춰 겨울도, 어른도 잠시 천천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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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 후, 아이들이 집에 가서 "너무 재미있었어, 주말에 또 가고 싶어"라고 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일주일간의 긴장을 내려놓았다. 그 하루는 이미 아이들의 마음에 무사히 도착해 있었다.


아이들은 얼음판 위에서의 시간을 통해, 책이나 화면 속 박제된 겨울이 아닌 ‘진짜 겨울’을 몸으로 배웠다. 콧등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와 사각거리는 얼음의 질감 앞에서 나는 늘 체험을 선택해 온 이유를 다시 확인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에게 건네고 싶은 하루는 그저 안전했고, 마음이 놓였으며, 함께 웃을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영하 15도의 겨울, 아이들은 추위를 이겨낸 것이 아니라 추위와 함께 웃었다.


결핍을 창의로 메웠던 나의 비료 푸대는 이제 아이들을 품에 안는 든든한 썰매가 되었다. 이런 하루가 켜켜이 쌓여 아이들에게 겨울이 그저 '추운 계절'이 아닌 '언제든 꺼내 보고 싶은 따뜻한 계절'로 남기를 바란다. 이런 하루를 건네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의 가장 큰 즐거움이자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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