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흔들려도 피하지 않는 마음

by 혜솔 황보영


찬바람이 불수록 소나무의 푸르름은 더 깊어진다고 한다. 앙상한 나무들 사이에서 소나무는 겨울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추운 계절에 비로소 자기 색을 온전하고 선명하게 드러낸다.


어린이집의 1월과 2월은 내게 그런 계절이다. 운영의 무게와 결정의 고민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흔든다. 걱정과 불안이 겹겹이 쌓인 현실 앞에서 괜찮은 척 웃다가도,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빈 교실에선 현기증 같은 두통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르누아르의 한 문장을 입속에서 천천히 굴려본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이 문장이 내 마음에 오래 머문 이유는 고통을 부정하지 않아서였다. 운영난이라는 시린 고통이 정말 지나가는 것일까, 아이들의 웃음이라는 아름다움은 정말 영원히 남는 것일까.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지점은 결국 교실 문을 열 때뿐이다. 힘들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너머에 남을 무언가를 조용히 믿게 해주는 힘. 내가 이 시린 계절에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그토록 단순하다.



숫자의 세계를 탐험하는 만 2세 아이들이 기발한 상상력으로 나를 웃게 한다면, 이제 겨우 두 돌을 지난 만 1세 아이들은 고도의 심리전으로 나를 긴장시킨다.


최근 숫자놀이를 하던 만 2세 아이 하나가 귤 두 개를 세로로 붙여 놓고는 외쳤다. “선생님, 이거 8자예요!” 옆에 있던 아이는 와플 블록을 숫자 7 옆에 가져다 놓으며 “똑같이 만들었어요!”라며 으쓱해했다. 폭풍 같은 칭찬을 쏟아내던 찰나, 조용히 지켜보던 또 다른 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누구 닮았겠어요. 선생님 닮아서 똑똑한 거지.”


순간, 꽉 뭉쳐 있던 뒷목이 스르르 풀리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오히려 내가 아이들에게서 한 박자 늦게 위로받고 있었다. 하루를 통째로 붙잡아 주는 힘은 늘 이런 뜻밖의 찰나에서 온다.


장난기 가득한 만 1세 반 아이의 ‘밀당’도 만만치 않다. 머리를 짧게 자른 조리사님을 굳이 “할아버지!”라 부르며 알면서도 놀리는 영악함, 조금 단호하게 훈육이라도 할라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리는 회심의 한방.


“흥, 나 집에 가서 우리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그 당당한 선전포고에 우리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만다. 과자가 먹고 싶을 땐 떼를 쓰는 대신 “선생님, 우리 집에는 과자 진짜 많다~?”라며 세련된 우회 전략을 택한다. 그 말간 얼굴 뒤에 숨겨진 고도의 심리전이라니. ‘이 아이가 정말 이제 막 두 돌을 지난 게 맞나’ 싶어 찰나의 긴장을 경험한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빠르게 세상을 읽고,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오래 망설인다. 그러나 아이들의 이 발칙하고도 사랑스러운 웃음소리는 언제나 나의 무거운 고민보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 웃음 한 번에 하루의 피로가 휘발되고 굳어 있던 마음은 봄눈 녹듯 풀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겨울을 건너고 있다. 아이들의 온기를 기꺼이 빌려서.


혜솔(慧松). 지혜로운 소나무라는 이 이름처럼,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 사람보다 흔들리면서도 끝내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거창한 세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우리 아이들이 숨 가쁘게 뛰어오다 털썩 주저앉아 쉴 수 있는 작은 그늘 하나만큼은 꼭 지켜내고 싶다.


눈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나무처럼, 계절이 바뀌어도 아이들 곁에 서 있는 마음만은 바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그 단순하고도 간절한 바람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나는 찬바람을 뚫고 아이들의 온기를 마중 나간다. 아름다움이 남을 거라는 믿음 하나로, 이 겨울의 한가운데를 걷는다. 흔들릴지언정 꺾이지 않는 소나무, 혜솔(慧松)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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