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뛰지 말어, 다쳐

어느 국숫집 할머니가 건넨 생명의 밧줄

by 혜솔 황보영


설 연휴를 보내고 훌쩍 지나간 2월.

유독 날짜가 짧아서일까요. 마음은 저만치 봄을 향해 앞서가는데, 일상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듯해 유난히 분주하기만 했습니다. 숨 가쁜 일과를 마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어느 저녁 책상 앞에 앉을 기운조차 없던 제 눈에 한 편의 글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글은 지쳐 있던 저를 가만히 일으켜 세웠습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릿해 차오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온기가 저를 감싸안았습니다. 세상을 향한 분노로 가득 찼던 한 사람의 손을 잡아준 것은 화려한 훈계나 거창한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도망가는 뒷모습을 향해 던진 “뛰지 말어! 다쳐, 배고프면 또 와.” 그 순박한 한마디였습니다.


그 짧은 외침이 벼랑 끝에 선 한 사람의 인생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되돌려 세웠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3월의 첫날 이 글을 읽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우리네 마음이 조금 더 따뜻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소중한 이야기를 이곳에 조용히 옮깁니다.


뛰지 말어, 다쳐


서울 용산의 삼각지 뒷골목엔 ‘옛집’이라는 허름한 국숫집이 있습니다.


달랑 탁자 네 개뿐인 그곳에서 주인 할머니는 25년을 한결같이 연탄 불로 진하게 멸치 국물을 우려내 국수를 말아냅니다.


10년이 넘게 국수 값을 2천 원에 묶어놓고도 면은 얼마든지 달라는 대로 무한리필이었습니다.


몇 년 전 이 집이 SBS TV에 소개된 뒤, 나이 지긋한 한 남자가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사연을 말했습니다.


“15년 전 저는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었고 아내마저 저를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용산역 앞을 배회하던 저는 허기에 지친 나머지 식당들을 찾아다니며 끼니를 구걸했지만 찾아간 음식점마다 저를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잔뜩 독이 올라 식당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국숫집에 가게 된 저는 분노에 찬 모습으로 자리부터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나온 국수를 허겁지겁 다 먹어갈 무렵 할머니는 국수 그릇을 낚아채더니 국물과 국수를 다시 듬뿍 넣어주셨습니다. 그걸 다 먹고 난 저는 국수 값을 낼 돈이 없어 냅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가게 문을 뒤따라 나온 할머니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뛰지 말어! 다쳐. 배고프면 또 와.”


도망가던 저는 그 말 한마디에 그만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그 후 파라과이에서 성공한 그는 한 방송사에 전화를 걸었고 그렇게 이 할머니의 미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곱게 자랐지만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해 이름조차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분에 넘치게도 대학을 졸업한 남자가 끈질기게 구애했고 결국 결혼을 했습니다.


건축 일을 하던 남편은 너무도 사랑했던 그녀와 네 남매를 남기고 41세 되던 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 네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이 극심해 어느 날은 ‘연탄불을 피워놓고 아이들과 함께 죽을까’ 하고 마음먹기도 했답니다.


그러던 중 옆집 아주머니의 권유로 죽으려고 했던 그 연탄불에 다시다 물을 올려 국물부터 끓였습니다.

그렇게 용산에서 국수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컴컴한 새벽, 막노동꾼과 학생, 군인들이 주된 단골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하나님! 이 국수가 어려운 사람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건강하게 하소서”라고 아침마다 기도한다고 합니다.


할머니 가게는 이제 ‘국민의 국숫집’으로 불립니다. 전직 대통령이 관계자들과 이 국숫집을 찾아 식사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오늘도 손을 모아 말합니다.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그 한마디는 오래도록 제 마음에 남아 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흘러나왔습니다.



멸치 국물보다 진한 안부


세상은 차가운 계산기로

서로의 무게를 잰다지만

삼각지 낡은 처마 밑에는

계산되지 않는 온기가 끓고 있습니다


도망치는 뒷모습에 던진

"뛰지 말어, 다쳐. 배고프면 또 와."

그 순박한 말 한마디는

원망을 녹이는 불씨였고

끊어지려던 생을 붙잡는 밧줄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지구가 여전히

내일의 태양을 기다릴 수 있는 건

높은 곳의 화려한 외침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건네는

따뜻한 국물 한 사발 덕분인지 모릅니다


오늘도 누군가의 허기진 영혼을 향해

조용히 기도를 담아 국수를 마는 손길

그 손길이 있어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라고

나는 다시 한번 믿고 싶습니다


할머니의 국수 한 그릇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벼랑 끝에 선 이에게 건넨 '살아야 할 이유'였고,

타인의 아픔을 계산하지 않는 마음이었으며,

나보다 더 낮은 곳을 바라보며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거창한 일을 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망의 끝에 선 한 사람의 인생을 붙잡은 것은

거대한 도움도 긴 설교도 아니었습니다.

단 한마디였습니다.


“뛰지 말어, 다쳐.”


상대의 처지를 판단하지 않고

사정을 묻지도 않은 채

그저 다치지 않기를 먼저 걱정해 주는 마음.


어쩌면 이 거칠고 삭막한 세상을 버티게 하는 진짜 힘은

이토록 소박한 다정함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누군가의 걸음을 멈춰 세우는 날카로운 말 대신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따뜻한 말을 건네는 사람이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내 곁을 지나는 누군가에게

우리는 기꺼이 말해줄 수 있을까요?


“뛰지 말어, 다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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