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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햇살영 Jul 28. 2024

04 가난 속의 책임이 중년의 사명으로 꽃피우다

사랑의 힘 - 불굴의 의지로 이뤄내다

 "당신의 사명은 당신의 삶의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과거의 고난과 기쁨이 현재의 당신을 만들어냅니다."  -오프라 윈프리

  저는 충청남도 산골짜기 마을에서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강하게 남는 몇 가지 기억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서로 장난치며 크게 웃던 모습, 아버지가 이른 아침에 저를 업고 동네 어른들께 자랑하던 모습, 방에 쥐가 들어와 무서워 엄마 품에 안겼던 밤의 기억, 그리고 아버지가 용감히 쥐를 잡던 모습, 아버지 무릎에 앉아 기역, 니은, 디귿... 아, 야, 어, 여... 한글 배우던 기억 등입니다.


  어느 여름날, 땅거미가 질 무렵 동네 아주머니께서 아버지가 쓰러졌다고 다급히 알렸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아프다는 게 심각한 일임을 알았습니다. 울면서 엄마의 손을 잡고 뛰다가 친척 오빠가 자전거로 태워 주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신작로 버스정류장 근처 원두막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잊을 수 없습니다.


  어렸을 때의 아버지는 자상하고 부지런한 분이었고, 어머니는 과묵하셨지만 착하고 잘 웃으며 생활력이 강한 분이셨습니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금실 좋은 부모님의 사랑 덕분에 단란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정 형편은 급격히 나빠졌고, 우리는 가난해졌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부부 사이는 여전히 깊었으며 자식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장녀인 저에게 특별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제 학습을 열정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과 지원 덕분에 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았고, 배움의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가 병약해지자 어머니께서는 생계를 위해 일을 나가셔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학교 대신 동생들을 봐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4살 차이 나는 동생을 업고 다녔습니다. 6,7살 어린아이가 2,3살 동생을 업고 다녔다는 것이 믿기나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때부터 제 등은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두 천 기저귀를 사용했기 때문에 기저귀가 금방 축축해졌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동생을 업고 다니며, 자연스럽게 보육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는 공부를 좋아했기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이 너무너무 싫었지만 동생들은 잘 돌봤습니다. 맛있는 것, 좋은 것은 모두 동생들 먼저 챙겼으니까요. 친구들이 놀 때도 저는 동생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놀곤 했습니다. 일 나가신 엄마가 돌아오시면 힘드실 것을 생각하여 집 안 청소도 깨끗이 해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도 지었습니다. 부모님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착한 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과 동생들을 위한 일은 마다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했습니다.


  그 시절 가장 속상하고 가슴 아팠던 것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가 저를 학교 결석시킬 때마다 미안해하시며 “엄마가 품삯을 받으면 밀린 육성회비 내줄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내기를 마치고 정말로 엄마가 학교에 오셨습니다. 엄마는 선생님 앞에서 허리를 깊게 굽히며 "죄송합니다, 육성회비를 제때 내지 못해서요"라고 말씀하시던 그 초라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저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중학교에 원서를 쓰는 모습을 동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느꼈던 열등감은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과 친구들, 친인척 주변 사람들 모두 제가 진학하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 하며 위로해 주었지요.  부모님께서는 학업에 열의가 넘치는 자식의 길을 열어주지 못하는 무력감에 가슴아파 하시며 죄인처럼 고개만 숙이고 계셨지만 아버지의 병치레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기에 한 번도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엄마와 저 우리 가족의 기둥이신 것은 분명했으니까요. 교복 입고 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웠고, 어떻게든 내 힘으로 진학해야겠다는 열망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쯤 당숙 아주머니께서 조심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ㅇㅇ야, 지금 너희 집 형편이 어려운 데다 어차피 올해 중학교에 가지 못하니 내년에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서울에 사는 ㅇㅇ 오빠 집에 가서 아기 좀 봐줬으면 해…"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네? 제가요? 왜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놀라서 즉답하지 못했습니다. 사연은 ㅇㅇ친척 오빠가 얼마 전 둘째 딸을 낳았는데 태열이 너무 심해 아기를 돌봐줄 착실한 아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엉겁결에 서울 구경을 하게 되었고, 오빠 집에서 1년 정도 아기를 돌봐주게 되었습니다. 


 오빠 집에는 갓 태어난 여자아이와 돌 지난 여자아이 자매가 있었습니다. 두 아이 모두 태열이 심해 새언니 혼자서는 양육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온몸이 시뻘겋게 변해 우는 아기를 안고 목욕을 시키며 느꼈던 안타까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가려움증으로 긁고 아파서 심하게 우는 아기를 업어서 재우곤 했는데 개운하게 목욕하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볼 때는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웠습니다. 4명의 동생을 돌보는 것에서 시작된 보육이 나의 사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이 너무 싫었지만, 동생들이 전혀 밉지 않았습니다. 내 곁에서 웃고 놀 때면, 나의 마음은 따뜻해졌고, 동생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나에게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서울의 친척 오빠 집에서 아기를 돌봐 줬을 때 오빠는 저에게 “언니보다 네가 아기를 더 잘 본다”라며 자주 칭찬해 주었습니다. 제가 아기를 착실하게 잘 돌보았던 것에 대해 오빠와 언니가 만족했는지, 부부는 저에게 고향에 가지 말고 서울에서 학교 다니며 아기를 봐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면, 어릴 적부터 아기를 돌보는 일을 자연스럽게 연습해 온 것이 아닐지 생각이 됩니다. 돌이켜 보면, 아기를 돌보는 일은 나에게 운명과 같은 것이었나 봅니다. 


  저는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배움에 대한 갈망을 인내로 성취하며, 선견지명의 지혜로 위기를 대비해 유치원 정교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보육교사를 시작했을 때, 그 자격증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았다고 할 만큼 절체절명의 소중한 자산이 되어 보육인의 삶으로 인도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우연이라 말하기엔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제 삶의 일부가 되었고, 제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일을 사랑하게 되었고, 제 운명이자 숙명으로서 사명임을 깨달았습니다.


결혼 후 전업주부로 살다가 40대 후반, 늦은 나이에 부득이한 사정으로 사회에 나오게 되었고, 어린이집 교사로서 경험을 쌓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집 교사라는 일이 저에게 생각보다 많은 즐거움과 기쁨을 주었고 저는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꼈습니다.

보육교사로 근무할 당시, 가정생활이 평탄치 않았는데 아이들을 만나면 하얀 백지처럼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육교사로 아이들을 만난 것이 저를 살린 것입니다. 특히 영혼이 맑은 어린 영아들은 저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다이돌핀과 같았습니다.

두물머리 현장학습 원장님 좋아요~~~

  영아 전문 어린이집 원장이 되어 지난 12년 동안 모범적으로 성장 발전해 오면서 모든 아이가 저의 품을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모님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습니다. 어린이집은 사랑과 인정이 넘치는 곳으로 항상 웃음소리가 가득합니다.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아닌,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희망의 빛이 되는 큰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상을 받으며 우수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단지 저의 노력만이 아닌, 인성이 훌륭한 보육교사 선생님들과 우리 어린이집을 믿고 맡겨주신 부모님들 덕분에 이루어진 성과입니다. 저는 학업의 길이 순탄하지 않았지만, 인내와 끈기 강한 의지력으로 포기하지 않고 꿈을 이룬 것에 대해 대견함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희망찬 내 인생의 주인공입니다. 이제 그림을 그리듯,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며 인생의 2 막을 열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각 꿈과 목표가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이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영아 보육의 앞날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도 제 꿈을 향해 나아가며,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소중한 순간을 나누고자 합니다. 인생 2막의 전환점은 저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진정한 저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어린 시절, 학교를 결석시키며 아기를 돌보라는 어머니의 부탁은 제게 큰 선물이자 축복이 되어 매일 감사함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가진 것 없는 약자의 삶은 녹록지 않았지만 누구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았고 아부나 아첨을 못 하는 저는 늘 정직과 성실함으로 노력하며 한순간도 헛되이 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먼저 돼라."라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고자 애쓴 덕분에 아이들과 부모님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얻은 가르침과 경험을 바탕으로 영아 보육의 전문가로서 사명감을 갖고 앞으로도 사랑이 가득한 보육 현장을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강한 정신력과 긍정적인 사고, 밝은 웃음 배움에 대한 열정 등 우성인자의 생명을 주시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신 부모님께 존경과 감사드립니다.


“진정한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관심으로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

두물머리 현장학습 나 잡아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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