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흰 여백

몸의 기억

by 혜솔 황보영




쾅—. 어둠을 덮고 내리던 하얀 밤이 찢어졌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차체가 멈춰 섰고, 그 순간 나는 현재라는 껍질이 깨지는 감각을 느꼈다. 앞유리로 쏟아지는 눈발은 여전히 맹렬했으나 세상은 필름이 끊긴 것처럼 고요히 굳어 있었다. 경직된 차체 안에 갇힌 채 나는 이 충돌이 만들어낸 시간의 균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재의 문턱을 넘어선 어딘가에서 오래 묻혀 있던 기억 하나가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일기 예보는 저녁 일곱 시, 첫눈을 예고했지만 그 말은 늘 그렇듯 낭만만을 남겼다. 한 달 전부터 약속해 온 자리를 향해 가던 발걸음은 가벼웠고 식당 창밖의 눈발은 배경처럼 흘렀다. 그러나 눈은 곧 얼굴을 바꾸었다. 굵고 맹렬한 눈송이들이 도로의 경계와 불빛의 윤곽을 삼켰다. 모든 것이 하얗게 지워지는 가운데 나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방향을 잃고 있었다.


우회전해 들어선 오르막길은 이미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 바퀴는 과속방지턱 앞에서 헛돌았고, 엔진은 공허한 소리만 토해냈다. 차들은 줄지어 멈춰 있었다. 사륜 차량 몇 대가 간신히 눈밭을 기어올랐지만 나와 같은 차들은 제자리에서 공회전만 반복했다. 뒤에서 밀려오는 압력, 앞에서는 통제력을 잃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차량들. 예고처럼 혹은 필연처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쿵—. 쾅—. 하얀 세상 속에 남은 것은 비명 같은 소리와 그 뒤에 찾아온 침묵뿐이었다.


눈발이 잦아들자 멈춰 있던 차들도 서서히 흩어졌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녹초가 된 몸으로 좌석을 뒤로 젖혔다.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로 낯선 감각이 스며들었다. 차가운 금속에 닿아 굳어 있던 몸이, 겨울 아랫목처럼 천천히 풀려갔다. 그 온기는 과거에서 흘러온 것이 아니라 몸 깊은 곳에서 스스로 타오르는 작은 불씨 같았다. 나는 그 불씨를 따라 조용히 오래된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래 전 눈은 늘 세상을 가득 채우는 존재였다. 무릎까지 잠긴 눈밭 위에서 예비군 모자를 거꾸로 쓰고 웃던 학창 시절의 소녀. 생솔가지를 꺾어 불을 지핀 구들장의 아랫목, 솜이불속에서 서로의 손발을 비비던 밤들. 난방은 늘 넉넉지 않았고 손발은 자주 얼어붙었다. 부모님의 손은 나무껍질처럼 거칠었지만 그 노동은 결핍으로 남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행복을 알지 못했으나 삶의 바닥에는 이미 순수가 깔려 있었다.


눈 내린 산길을 아버지와 함께 걸으며 산토끼의 발자국을 좇던 겨울날들. 하얀 숲 속에서 갑자기 솟아오르던 까투리 한 마리의 날갯짓. 눈밭 위로 번지던 그 선명함과 자유로움은 겨울이 품고 있던 생명의 맥박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자연의 품에서 자란 시간들이 내 마음 깊숙한 곳에 한 겹의 순수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순수가 세상이 미끄러지는 순간마다 나를 붙잡아 주었음을 이 밤에서야 또렷이 알게 되었다. 첫눈이 내린 밤 근원에 가까운 기억들이 다시 조용히 내려앉았다.


나는 행복을 가르치는 이름으로 살고 있지만 첫눈 속에서 길을 잃고 멈춰 섰던 그 순간 행복은 이론이 아니라 몸의 언어로 다가왔다. 순수란 정돈된 세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남아 있는 내면의 밑동이었다. 그 밑동에서 피어나는 온기는 과거의 회상도 미래의 약속도 아니었다. 바로 지금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 온기가 머무를 자리가 필요했는지 첫눈은 사고의 밤과 오래된 기억 사이에 흰 여백을 남겼다. 나는 그 여백 속에서 낯설면서도 오래 알고 지낸 나를 마주했다. 그 밤이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길 위에서조차 설렘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아직 내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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