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K-맏딸

자화상, 어둠을 데우는 사람

by 혜솔 황보영



자화상, 어둠을 데우는 사람


혜솔 황보영



어린 날의 나는

가난의 무게보다

사랑의 온기를 먼저 배운 아이였다


엄마는 생계를 위해

베틀 앞에서 하루를 짜 넣었고

나는 그 빈 손길을 대신해

동생을 등에 업고 흙길을 걸었다


배고픈 점심의 빵을 손에 들고

입안 가득 차오르던 허기를 삼키며

집에서 기다릴 작은 손들을 떠올려

그 배고픔까지 품어 안은 채

허름한 집을 향해

날개 없는 천사처럼

달려가던 아이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가마솥의 뜨거움 앞에

머뭇거리던 고사리손의 떨림

어린 나는 그때부터

타인의 자리에서 먼저 서보는 마음으로

깊어져 갔다


십 대 중반의 나는

교복 대신 작업복을 입었고

가장 부러웠던 것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의 뒷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단 한 번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학교에만 갈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 하나로

포르말린 냄새를 견디며

밤의 책장을 눈시울이 따갑도록 넘겼다


청춘조차 삭풍처럼 갈려 나가던 잔혹한 자리

하루에도 몇 명씩 맥없이 쓰러지던 또래들 속에서

나는 배움 하나를 빛처럼 단단히 안고

혹한을 뚫고 끝내 피어난 인동초가 되었다


배움을 멈추지 않는 기적

그것이 모든 고됨을 비추던 등불이었다


뒤늦게 맞이한 나의 봄

더디게 핀 꽃도 결실을 맺듯

졸업을 앞둔 내 앞에

꿈에 그리던 대학의 문이 열렸지만

나는 그 선택의 기로에서

내 꿈보다 가족의 내일을 먼저 세웠다


매월 봉급을 건네던 날

내 손보다 먼저 떨린 것은

아버지의 마른 손등이었다

그 작은 봉투 하나로

송아지가 집에 들고

초가집은 양철 빛 지붕을 얻었으며

밭 한 마지기가 새로 생겼다


그렇게 나는

나의 꿈을 한쪽에 접어 두고

조용히 효도의 길을 걷는

든든한 기둥 같은 사람이었다


오직 맏딸의 소명으로

가족의 내일을 먼저 일구어내고

삶의 무게를 견뎌낸 그 손으로

나는 새로운 인연 앞에 섰다

사랑만 있다면 모든 험난함을 건널 수 있으리라 믿었던

참으로 순진하고도 뜨거운 시절이었다


세상의 계산으로는 답이 나올 수 없는 조건

한숨이 늑골까지 스며드는 빈 손이었지만

따스한 가정을 지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세상이 우리의 사랑을 염려하던 때에도

나는 스스로의 선택을 끝끝내 지켜내려 했고

그 뜨거운 믿음 하나로

새 삶의 문턱을 조심스레 넘었다


그러나 함께 기대어 설 자리에

그의 마음은 아직 한 철 바람처럼 흔들렸고

짙게 드리운 마음의 그늘을

어루만지듯 대신 품어야 했다


어린 날부터 익혀온 ‘품는 마음’으로

삶의 서늘한 현실 한복판에서

나는 꺼지지 않는 사랑을 가슴속에 지피고

자존심을 깊은 곳에 숨긴 채

그 울타리를 끝내 지켜냈다


그리고 지금

수많은 어린 생들의 첫 세상을 지켜주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서 있다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교실 안에서

학부모의 기대와 불안 사이

교직원의 수고와 침묵 사이

나는 늘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랑으로 길을 닦는다


희생은 내게 짐이 아니었다

사랑은 내게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는 사람의

유일하고도 본질적인 결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저 없이 선언한다

희생과 사랑이 빠진다면

나는 공허한 껍데기일 뿐이라고


불꽃같지만 아프게 타지 않고

어둠을 밝히며 따뜻하게 남는 사람


강줄기를 품어 안듯

한 그루가 아닌 숲을 바라보며

새 생명을 품어 올리는 사람


그것이

오늘 내가 세상에 드러내는

나의 가장 진실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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