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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백화점 '더 헤리티지'와 문화향유권

서울의 근대 건축물이 리테일 공간으로 활용되는 첫 사례

by 조형일


일제시대 건축물로 내부를 원형에 가깝게 복구하여 일반영업점으로 사용하던 구 SC제일은행 본점 건물을 좋아했습니다. 이 건물이 2015년 신세계그룹에 850억에 매각되고 SC제일은행의 간판을 내린 순간부터 신세계그룹의 활용안이 궁금했습니다. 언론에는 용인에 위치한 신세계 그룹 박물관을 이 곳으로 옮겨 신세계 상업사 박물관으로 활용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계획대로라면 그리 오래 걸릴 일이 아님에도 이 안은 좀처럼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신세계그룹은 대외적 공표와는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것입니다.


4월 오픈 예정인 서울 충무로 신세계 백화점 ‘더 헤리티지’관. 이 건물은 1935년 조선저축은행 본점으로 세워졌습니다.


지난주 오랜만에 신세계 백화점 충무로 본점을 찾았습니다. 신관 6층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려다가 옛 직장 몽블랑의 매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본관 지하 1층에서 신관 6층으로 장소를 바꿔(Relocation) 문을 연 것입니다. 매장에서 만난 옛 동료는 대중 브랜드를 축소하고 럭셔리 브랜드의 영업 면적을 넓히는 백화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구 제일은행 본점 건물이 10년만에 리테일 공간으로 활용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밖으로 나가보니 과연 공사가 한창입니다. 드디어 서울에도 근대 건축물을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등장한 것입니다. 해외에는 드물지 않은 일입니다. 최근에 방문한 도시 중 인상깊게 본 매장은 상하이의 Maison Patek Philippe과 고베 다이마루 백화점의 HERMES 매장입니다. 우리에게 없는 시간이 쌓인 아름다운 리테일 공간이 저는 항상 부러웠습니다. 그간 이 땅에서는 문화유산을 공공재로 간주하여 상업적 활용을 꺼리는 보수적 분위기가 강했기에 이번 신세계의 시도는 반가울 수 밖에 없습니다.


상하이 Maison Patek Philippe. 1884년 영국 영사의 주거 건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도 잠시 CHANEL이 대부분을 차지할 1, 2층 공간과 백화점 VIP 고객을 위한 프리미엄 라운지 계획을 보며 건물로부터 일반 시민들이 배제되진 않을까하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당장 저부터 이 건물에 들어가기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음은 언론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신세계의 초호화 전략…한국 백화점서 제일 큰 샤넬·에르메스 만든다.

프라이빗 중시…3층에 만들 VIP라운지 면적을 넓히기 위해 F&B시설 크기를 기존 계획보다 축소.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는 독립적인 공간을 선호하는 VIP고객의 취향을 고려

출처 :2025-01-16 서울경제



구매력으로 등급화된 고객들이 이제 아예 별도의 건물을 사용하는 한층 노골적인 구획화 아이디어에 덧붙여 상하이 파텍필립이나 고베 에르메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 샤넬 코리아의 대기열을 생각하면 이 건물에 보통 사람의 접근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시민의 문화 향유권이 고려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987년 다이마루 백화점 고베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980년대 후반 다이마루 고베점이 있는 모토마치는 고베의 교통과 사업 중심지가 산노미야로 이동하며 활력을 잃었습니다. 이에 다이마루 백화점은 구 외국인 거주지 건물들에 브랜드 매장을 개점해 지역 전체를 활성화 시키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점’에서 ‘지역’으로 확장하는 접근법입니다. 현재 에르메스와 꼼데가르송 등이 입점한 ‘구 외국인 거주지 38동 건물’은 이러한 전략의 결과물입니다. 근대 건축물을 활용한 상업공간은 이제는 모토마치의 특색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근대 건물을 향유하기 위해 이 곳에 모여듭니다.


고베 다이마루 HERMES. 이 건물은 1929년 미국계 은행의 분점으로 세워졌습니다.

신세계백화점 ‘더 헤리티지’가 단순히 상업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 활성화의 중심이 되며,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확장성을 가진 매력적인 공간으로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4층에 개관할 박물관을 포함해 아직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공간들에 공공성과 문화적 가치가 충분히 담보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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