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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와 프로스펙스

1992년의 Mizuno를 보며 한국 스포츠 브랜드의 종언을 생각한다.

by 조형일

오늘날 그럴싸한 스포츠 브랜드 하나 없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지만, 한때는 우리도 꽤나 진취적인 스포츠 브랜드를 여럿 가지고 있었다. 시작은 1981년 8월 국내 신발 업계 5위권에 불과한 풍영에서 미국의 나이키를 론칭한 것이었다. 나이키의 등장과 함께 한 해 전만 하더라도 가장 유명한 신발상표이자 3-40년간 낯익은 이름이었던 「왕자표」, 「범표」, 「말표」, 「기차표」등이 일순간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나이키에 대응하기 위해 왕자표의 국제상사는 프로스펙스를, 말표의 태화는 까발로를, 범표의 삼화는 타이거를 신발 '메이커'(우리나라가 OEM생산의 전초기지이던 시절 브랜드를 메이커라 불렀다)로 선보였다. 이중 프로스펙스는 스포츠 의류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진정한 의미의 스포츠 브랜드가 되었고 이후 1984년 코오롱의 액티브, 1986년 화승의 르까프가 연이어 등장하며 한국 스포츠 브랜드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이들이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는데 해당 대회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을 후원함과 동시에 개최국 수혜로 선수촌 요지에 매장을 두고 노출을 늘려 해외 일부로 판매망을 확장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들 브랜드가 칼 루이스와 미즈노의 1991년 8월 도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100m 세계기록(9.86초)과 같은 국제 스포츠 현장에서 의미 있는 기록을 만들어낸 경험은 전무했는데 판매망 확장에 고무된 이들은 이 한계를 경시한 채 세계 진출을 자축하기 바빴다.


유럽에 로열티를 받고 수출된 프로스펙스의 광고에 '세계적 상표' 표현이 보인다. (1988)


기능 없는 스포츠 브랜드의 한계는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나타난다. 미즈노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100여 명의 직원들을 현장에 파견하여 육상 레전드 칼루이스를 앞세운 대대적인 홍보전을 벌이고, 아식스는 마라톤 금메달 리스트 황영조의 러닝화가 자사의 것임을 내세우는 등 일본 브랜드들이 올림픽을 해외시장 확대의 장으로 활용한 반면 프로스펙스, 액티브, 르까프, 라피도 등 우리 브랜드들은 국내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대한민국 선수단에 경쟁적으로 구애하고 정작 올림픽 현장에서는 선수촌 밖에서 삼삼오오 판촉물을 나눠주는 재래식 홍보를 하는데 그쳤다. 개최국 프리미엄이 빠졌을 때 우리 브랜드의 글로벌 경쟁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스포츠용품이 시장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선수들의 대회에서의 착용이 필수적이다. 당시 우리는 이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분기점에서 우리 브랜드들은 기술개발을 통해 세계시장에 도전하기보다 국내 시장을 나눠먹는 것으로 전략적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선수들이 신지 않는 스포츠 브랜드는 이미 대중에게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고, 90년대 국내 시장은 나이키와 리복 등 글로벌 브랜드의 성장으로 경쟁이 더욱 치열해져 있었다. 선망성이 사라지고 기능적 발전이 더딘 상태에서 국내 브랜드들은 고객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 나이키, 리복과 같은 유명브랜드의 디자인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이는 스스로를 유사품으로 규정짓는 행위였고, 유사품의 영업 전략은 '저렴한 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시기 프로스펙스와 르까프는 나이키, 리복의 값싼 대체제로 전락한다. 이후 IMF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이들은 대안으로서의 지위마저 박탈당하고 글로벌 브랜드에 휩쓸려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하비에르 마리스칼의 1992년 올림픽 마스코트 Cobi


호돌이 디자이너 김현은 한 인터뷰에서 하비에르 마리스칼의 ‘92 올림픽 마스코트 코비를 처음보고 수준 차이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후원사 미즈노는 이전 대회의 공식 후원사이자 세계적 브랜드임을 자임하던 국내 스포츠 브랜드들과 확연히 대비되는 국제적 스포츠 브랜드의 수준을 알 수 있게 한 좋은 표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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