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에게는 달과 별, 찬 공기, 따뜻한 날숨, 더럽혀진 낙엽, 구두, 버스 정류장, 핸드폰, 가죽 재킷, 친구, 선로가 있었다. 내일을 포기하고 얻은 전부였다. 사실은 포기한 것이 아니라 도망친 것이다. 무력감과 책임감, 사랑과 모순, 돈과 이상, 자기혐오와 신념으로부터.
예측할 수 없고 뭐든 해도 상관없는 하루가 필요했다. 고원과 친구들은 서로의 들뜬 표정을 보며 우리 모두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의 걸음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기차는 묵직한 엔진음을 내며 모두의 끝을 향해 내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원과 친구들은 텅텅 빈 파란 좌석들을 지나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고원과 한수가 같이 앉고 그 앞에 서진과 세현 그 옆에 여진이 앉았다. 고원은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진짜 대전에 가는구나... 1시간 25분 뒤면 광명, 평택, 천안, 세종을 거쳐 대전역에 도착한다. 폭신하고 아늑한 좌석에 고원의 눈꺼풀은 저항 없이 감겼고 옆에 앉은 한수는 잠시 찾아온 여유를 즐기며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창문 너머 승강장은 뒤쪽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다섯 명의 청년들은 설렘을 품고 잠에 들었다.
스피커에서 스티브 바라캇의 캘리포니아 바이브가 흘러나왔다. 평소 설정해 둔 아이폰의 밝은 햇살 알람음이 아니었다. 고원은 경쾌한 음악과 함께 곧 정차한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 깼다. 서진, 세현, 여진, 한수도 줄줄이 일어났다. 잠이 덜 깬 탓에 한쪽 눈이 감겼고 다른 친구들도 비몽사몽 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드디어 대전역이다. 오전 6시 20분 역 앞 조그마한 광장에서 나물 팔 준비를 하시는 할머님들이 가장 먼저 그들을 맞이했다. 지금부터 오후 5시까지의 계획은 대략 이러했다.
1. 찜질방에서 개운하게 씻고 눈을 붙인다.
2. 유명한 맛집의 두부 두루치기를 먹는다.
3. 성심당에서 산 빵과 함께 커피를 마신다.
4. 5시 기차를 타고 6시 반에 서울역에 도착한다.
찜질방은 버스 타고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교통 카드를 찍을 때까지만 해도 깜깜했는데 하차벨을 누를 때가 되니 슬슬 동이 트기 시작했다. 그들은 언덕진 도로 옆 우두커니 자리한 정류장에 내렸다. 지평선 너머 연한 주황빛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어스름한 남색은 서서히 밀려 사라지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 위치한 찜질방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고원은 한수와 함께 남탕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체로 활보하시는 할아버님을 목격했다. 고원은 순간 당황했지만 의식하지 말자고 되뇌며 아무렇지 않은 척 옷을 벗어 고이 접어둔 뒤 곧장 씻으러 들어갔다. 그는 한수와 어색해질지도 모른다는 꾀죄죄한 걱정에 비누 거품을 묻혀 말끔히 씻어냈다.
보통은 샴푸와 클렌징, 바디 워시를 구분해서 사용하지만 오늘은 비누만으로 충분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씻은 뒤 미온수로 흘러내렸다. 고원과 한수는 김이 나는 초록색 물에 몸을 담갔다. 어렸을 때는 뜨겁고 답답해서 싫었는데 아빠 나이에 가까워지니 왜 시원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은 고원이었다. 그는 전날 밤 한수와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들은 한 치 앞을 모르겠다는 말을 했고 그저 버티는 것이 방법이며 자신을 믿어야 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지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서로 처한 상황은 달랐지만 둘 다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꿈을 좇는 두 청년의 대화는 불안과 의지, 존중과 응원으로 뒤섞여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에 맞춰 황토색 옷을 입고 나갔다. 서진, 세현, 여진은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딱딱한 바닥에 얇은 매트를 깔고 황토 냄새가 나는 직사각형 스펀지 베개를 베고 누웠다. 이불이 따로 없었음에도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가 너무 포근해 금방 잠들 수 있었다.
오전 11시 여성들은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 먼저 일어났다. 씻고 들어온 남성들은 좀 더 느긋하게 움직였다. 옷만 갈아입고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여유롭게 나왔다. 개운하게 씻었고 잠도 푹 잤다. 다음은 배를 채울 차례였다.
세현이 찾은 두부두루치기 집은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맛집이었다. 가게 입구부터 골목 초입까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섰다. 대기줄의 중간 즈음 고원과 친구들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맑은 공기 덕에 높게 솟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지만 동시에 너무 차가워 볼이 살짝 아렸다. 15분을 더 코를 훌쩍인 뒤에야 가게 안으로 입장했다. 손님들로 꽉 찬 테이블 사이사이로 아주머니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맛집이 대개 그렇듯 대표 메뉴는 정해져 있었고 우리는 정석에 맞게 두부두루치기와 수육, 막걸리 한 병과 콜라 한 병을 시켰다. 음료와 주류가 먼저 나왔는데 요즘에는 보기 힘든 355ml짜리 유리병 콜라가 나오자 다들 신기함과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캔이나 플라스틱처럼 가볍지 않은 유리의 묵직함과 매끈한 병의 굴곡 때문인지 콜라가 더 시원하고 달게 느껴졌다. 고원은 순간 9살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매콤한 두루치기와 수육의 궁합은 아주 좋았고 남은 두부에 밥까지 비벼 먹어 그릇을 싹싹 비웠다.
오후 1시 30분 성심당 안은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마치 거대한 두 해류가 만나 넓고 굵은 물줄기가 뒤섞여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힘에 이끌려 흘러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만화에서나 보던 빵 쟁탈전이 대전의 수도라는 성심당에서 치러지고 있었다. 다섯 명의 전사들은 자신의 목표물을 찾아 무자비하게 집게를 휘둘렀다. 목표물을 포획하고 벽 같은 인파를 헤쳐 결제까지 마쳤다. 혼란스럽고 치열했던 전쟁터를 벗어나니 전에 먹었던 두루치기와 수육은 본 적도 없는 것처럼 배가 고파왔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커피 다섯 잔과 나눠 먹을 빵을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거북이 등껍질 같은 멜론빵도 있었고 달달한 튀김 소보로와 촉촉한 우유크림빵도 있었다. 고원은 이렇게 다양한 빵을 한 번에 먹는 게 처음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원은 평소 빵을 즐겨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친구들과 대전에 왔고 살짝 일그러진 분홍색 토끼 푸딩으로 한수의 생일을 축하하고 다 같이 웃고 숨을 쉬며 여유를 즐기고 원래의 오늘로부터 잠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빵이 너무 좋았다. 맛있었다.
오후 5시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다. 스크린 도어가 없는 아주 낮은 단차의 선로가 그들 앞에 깔려있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건너편으로 질러갈 수 있을 높이였다. 그들은 여행의 마지막을 충분히 음미했다. 기차는 천천히 가까워졌고 어스름은 서서히 짙어졌다. 기차는 예정대로 도착했고 그들 또한 예정대로 탑승했다. 기차가 출발한다. 그들의 원점으로. 해는 졌지만 아직 하늘 끝에 빛이 연하게 남아있었다.
고원은 서울역에서 공덕 공덕에서 망원역으로 갔다. 익숙한 풍경과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고원도 그중 한 사람일 뿐이다. 늘 그렇듯 1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으로 틀었다. 오렌지마트를 지났고 오른쪽 골목을 끼고돌아 왼편에 자리 잡은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5평의 단칸방에는 여전히 어질러진 그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고원은 한 손에 쥔 빵을 내려놓고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