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아니면 모
큰 개를 데리고 지나가면 어르신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린다—적대적이거나 다정하거나.
우리 가족이 직접 겪은 적대적인 반응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대략 네 가지로 분류된다.
① 그냥 다짜고짜 쌍욕.
개가 다가간 것도 짖은 것도 쳐다본 것도 아닌데 말 그대로 있는 욕 없는 욕을 퍼붓는다. 이것은 광견.......병?
② 입마개 강요.
길가장자리로 냄새 맡으며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쫓아와서 삿대질, 개를 발로 차는 시늉까지 하면서 이런 사나운 개는 입마개를 해야 한다고 악을 쓴다. 그래, 맞다. 사나운 것들은 모두 입마개를 해야 한다, 종을 불문하고.
③ 무어라 정의하기 힘든 이상 반응.
폭 5미터 도로 끝에서 걸어가는데 반대편 끝에서 걷던 할머니가 대각선으로 개를 향해 돌진, 개를 엄청 사랑하시나? 싶었는데 개한테 몸을 기울이면서 '나 개 싫어해, 꼬리 치지 마. (우리 딸을 보며) 야, 개 데리고 여기 돌아다니지 마' 이 와중에도 자기한테 말 걸어줬다고 꼬리 치는 눈치 없는 버찌...
공원에서 잔디밭 연석을 따라 냄새 맡으며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달려오는 할아버지, 개와 연석 사이로 파고들며 "여기 우측통행하는 데야, 꺼져." 지나가는 사람들마저 당황, 엥? 여기 그냥 공원인데 우측통행?
④ 일부러 들으라고 큰소리로 대화.
"집 앞에 어떤 개 같은 X이 아침마다 개똥 든 비니루를 버리고 가고 지랄이야" 옆에 계신 분은 더 크게 맞장구를 치신다. "그런 X들은 개똥을 처먹여야지." 개똥을 안 치우거나 제대로 치우지 않는 사람들은 나도 정말 극혐한다. 이분들 의견에 매우 공감한다.
뜻밖에 아주 야비하고 어이없는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짜증 내지 마라. 그냥 지식이 하나 늘었다고 생각하라. 인간의 성격을 공부해 가던 중에 고려해야 할 요소 하나가 새로 나타난 것뿐이다. 우연히 아주 특이한 광물 표본을 손에 넣은 광물학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라.
- Arthur Schopenhauer -
사실 버찌는 보더콜리치고 큰 편이 아니다. 모견이 워낙 작아 1년이 다 돼 가는 지금도 16kg 정도. 그래도 아무튼 5kg 미만 소형견이 압도적인 우리나라에서 버찌는 큰 개에 속한다. 도베르만이나 셰퍼드처럼 덩치가 특히 더 크고 외모마저 카리스마 넘치는 개를 키우시는 분들에게 어떻게 대처하시는지 물어보니 이러한 시비들 때문에 바디캠을 장착하고 다니시는 분들도 꽤 있었다.
'우리 개는 순해요, 절대 안 물어요'도 몰상식이지만 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아무 이유 없이 다가가 욕을 하고 소리를 질러도 된다는 것은 어떤 상식인가? 개가 정말로 무서우면 그렇게 바짝 다가가서 시비를 걸 수 있을까? 오히려 반대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다가와 욕을 해도, 발로 차는 시늉을 해도 그 개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지하철에서 키가 2미터가 다 되는 거구의 남성이 여자 옷을 입고 여성 승객에게 다가가 '가방이 있으니 지갑도 있지 않나, 돈을 달라'고 협박해 갈취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승객은 출퇴근 시간을 피해 자주 나타났는데 그에게 다가가 "덩치가 이렇게 크니 무섭다, 밖에 나올 때 입마개랑 수갑 차고 다녀라, 왜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뺏냐'라고 삿대질을 하거나 야단을 치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왜? 무서우니까.
세상에는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사람이 많은 길이 보이면 멀리 빙 돌아가고 어딜 가나 구석으로 다닌다. 산책도 캄캄한 새벽 혹은 한밤중에 주로 나간다. 아무 피해도 주지 않고 얌전히 걷는 개와 견주에게 쫓아와서 욕을 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러한 행동이 개에 대한 공포심이 아닌 그들의 열등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대응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지만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큰 개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할머니는 버찌를 보고 "미국 갠가 봐, 얘는. 금발이네..."라면서 예쁘다고, 멋있다고 하신다.
어떤 할아버지는 날씬한 버찌의 몸매를 보고 걱정이 태산이시다. "개가 너무 말랐어, 밥을 쪼끔 주나 봐." "얘는 원래 이렇게 생긴 개예요, 보더콜리라서..." "그래도 밥을 많이 줘야지." "아, 네, 많이 줄게요." 그래도 못 미더우신지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신다. 보더콜린지 브로콜린지는 알바 아니고, 자고로 개는 D라인으로 통통해야 하는 것인데 뭘 모르는 처자가 개밥을 너무 조금 주는 것 같아 못내 안쓰러우신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