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이던 어린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산 아래 작은 집에 도착했다.
엄마와 나를 반기는 사람들이 서 있었고, 엄마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 이 집에서 동생들과 새 아빠와 같이 살 거야"
엄마는 내가 6살 때 이혼을 했다.
남동생은 아빠가, 나는 엄마가 키우기로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충청도 어느 작은 집에서 새 아빠와 동생 두 명과 함께 살게 되었다.
1년이 지나 막내 동생이 태어났다.
엄마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매일 술을 마시며 일을 하지 않는 새 아빠,
그로 인해 모든 농사일은 엄마 혼자 감당하게 되었다.
7살인 나는 막내 동생을 업고 엄마가 일하는 곳으로 다니며
동생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었다.
엄마가 집에 없는 시간은 온전히 동생들은 내가 돌봐야만 했다.
새 아빠가 술에 취해 잠이 들면 우리는 조용히 숨을 죽이며 놀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잠에서 깬 새 아빠의 손이 우리에게 향했다.
그 폭력은 술을 마시면 엄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아랫집에 달려가 도움을 요청하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겨울이면 술 심부름을 하느라 손에 동상이 생기기도 했다.
그 술 때문에 우리는 또 무서움에 떨어야 했다.
어느날, 술에 취한 새 아빠와의 다툼이 시작되었고
엄마는 어김없이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그날, 엄마는 농약을 마셨다.
놀란 나와 동생들은 또 아랫집 어른들에게 도움울 요청했다.
엄마가 병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나와 동생들은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뎠다.
병원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에도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잠깐의 평안함 뒤에 또다시 두려움은 시작되었다.
어린 나는 매일매일 기도를 했다.
"오늘은 제발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게 해주세요"
"그러면 동생들도 잘 보고 엄마 말도 잘 들을게요"
하지만 나의 기도는 한 번도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방학이 되면 나는 경기도 여주에 있는 외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외할머니 댁에서는 싸움도, 폭력도, 눈물도 없었다.
가끔 엄마가 외할머니 댁으로 폭력을 당하고 피신해 오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새 아빠는 잘 못했다며 용서를 빌고 엄마를 데려가곤 했다.
방학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야 할 집이 너무 싫었다.
외할머니 댁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면 엄마가 더 힘들어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엄마 옆에 있어줘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다.
엄마는 나의 보호자였고,
나는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 서로를 지켜내주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는 것은,
나를 지켜내기 위한 하나의 단단한 보호막이 된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건 살아가는 데 가장 큰 용기가 되어준다.
나는 엄마의 보호막 아래에서 하루하루 용기를 내며 살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