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더에서 만난 남편_1

저랑 같이 호빠 가주실래요?

by Tree and Earth

ISTJ에 계획적이고 조심성 있고 안정성을 추구하며 살던 내가 그 계기가 아니었다면 데이팅 앱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 같다. 43세 외국계회사 차장. 역삼에서 살며 서초로 출퇴근. 퇴근 후엔 피트니스로 직행해서 운동하고 저녁식사는 스킵하고 와인 한두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 모든 게 평온하고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통장의 잔액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회사일은 별 탈 없이 흘러가던 어느 날.


같은 팀 과장님이 퇴사한다며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어디로 이직하는지, 왜 이직하는지, 어떻게 용기를 냈는지 등등 흔한 퇴사자와 할법한 얘기를 하던 도중 갑자기. 정말 느닷없이 이 언니가 자기가 처녀라고 고백했다. 남자를 사귀어 본 적도 없고 섹스를 해본 적도 없고 이 금기를 깨고 싶은데 지인이랑 일을 저지르기에는 관계와 평판에 위험성이 있고. 블라블라. 짧은 점심시간 뜻하지 않은 토픽에 당황하고 있던 나에게 과장님이 말했다. 저랑 같이 호빠 가주실래요?!!??


내가 살던 역삼역 주변은 밤이 되면 소돔과 고모라로 변했다. 한 블록에 호빠 명함을 세네 장은 기본으로 받고 길바닥에는 아가씨들의 헐벗은 광고사진이 그득했다. 하지만 낯선 사람과 스킨십을 싫어하고 조심성 있는 나로서는 한 번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풀고 싶은 스트레스가 있지도 않았고 하룻밤 호빠에서 젊은 총각들을 거느리고 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왜 많은 돈을 들여서 그렇게 노는지 이해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장님의 솔직대담하고도 파격적인 제안의 목적은 호빠를 가자가 아니라 처녀딱지를 떼고 싶다는 거였고 그럼 호빠가 아니라 데이팅앱에서 늑대를 만나는 게 더 경제적이고 빠른 해결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얘기를 하자 과장님은 무섭다고 나보고 먼저 데이팅 앱을 해보고 말해달라고 했다. 왜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을까? 무료해서였을 것이다. 40이 넘은 여자에게 소개팅은 잘 들어오지 않는다. 막내이모가 선자리를 제안했는데 돌싱남이어서 6개월 동안 이모 전화를 안 받은 적도 있다. 회사-피트니스-주말엔 백화점. 이 쳇바퀴 같은 루틴을 깨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 모든 복합적인 감정으로 틴더앱을 깔았다. 영화를 보면 맘에 들면 오른쪽 맘에 안 들면 왼쪽 이렇게 쉽게 누군가를 만나서 낯선 여행지에서 밤을 보낸 에피소드들이 생각났다. 진짜 쓰레기 같은 늑대들만 있으면 어쩌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쩌지? 별 걱정이 다 들었지만 그냥 시작했다. 푹푹 찌는 초여름의 어느 날 스노우 앱을 깔아서 사진을 보정하고. 최대한 담백한 사진과 문구들로 소개글을 쓰고. 연락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노출되지도, 내게 그 사람이 노출되지도 않게끔 설정하고 프로필을 올렸다.


매칭 알람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슈퍼라이크를 써가며 환심을 사려는 사람들도 많았고 한국에 출장 와서 현지 여친을 찾는 외국인들도 있었다. 몇 번 말을 하다 보면 찐 늑대인지. 진심 짝을 찾고 싶어 하는 진정성 있는 사람인지 등이 감이 왔다.


그렇게 틴더앱을 깐 지 6개월 만에 지금 남편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