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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유지향 Nov 16. 2023

비를 보다가, 문득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발을 멈춘다. 곧게 내리 뻗으려던 빗줄기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내 어깨쯤에서 우왕좌왕거리는 몇 마디의 짧은 빗줄기들. 가방 안에 손을 넣어 우산을 찾는다. 삼단 접이 우산의 작은 몸체를 단속하고 있던 똑딱단추를 연다. 돌돌 말려있던 몸체가 옹크렸던 몸피를 파르르 떤다. 우산이 활짝 펼쳐지며 바람에 휘청거린다. 손잡이를 꽉 감아쥔다. 부러질 듯 휘어지는 가느다란 우산살이 신호가 꺼진 사거리에 진입한 자동차처럼 아슬아슬하다.


투명하고 간결한 수직의 마디는 바람을 맞닥뜨린 지점에서 여러 개의 몸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예상치 못한 어느 지점에서 바람을 만난 비처럼 휘청거린 적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바람을 만난 비 앞의 삼단접이우산처럼 그놈을 상대할 무기가 되지 못 한적 있었을 것이다.

허공에서 수직으로 내리 뻗으려던 빗줄기는 엉겁결에 들이닥치는 바람을 맞닥뜨리고 휘청거린다. 그 지점에서부터 빗줄기는 내려 닿기를 예상했던 착지지점을 벗어나지 않으려 자신의 몸통을 몇 마디씩 끊으며 방향을 수정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의 마디들은 점점 짧아지고 바람 앞에서 속수무책 당하고만 있다. 더욱 흔들리며 자신이 정해 둔 방향으로 가 닿지 못한 빗줄기는 제 몸피를 둥글린다. 상처 입은 비는 둥글게 둥글게 각지고 뾰족한 것은 모두 버리고 있다.


상처 입은 비의 이름은 빗방울이 아닐까. 유리창에서 빗방울들이 조금은 구불거리고 조금은 짧은 빗줄기를 다시 만들고 있었다. 비는 누구도 찌르지 않으며 상처는 상처로 남기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듯했다.

도서관 처마 밑 유리 벽은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끊임없이 부딪혔다 흘러내기를 무한 반복하는 상처 입은 비의 세계다.


우산에 박혀있던 자잘한 꽃들은 바람을 따라가고 싶은지 심하게 몸을 실룩거렸다. 손잡이와 우산대를 있는 힘껏 꽉 붙들었지만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제 속을 홱 뒤집어 바람에게 보여준다. 빗속에서 바람을 만난 꽃무늬 우산은 안쪽부터 젖어들었다. 비는 우산을 들고서도 젖는 사람들을 묵독한다. 어깨에 걸린 울울창창한 숲을 닮은 진초록색 에코백도 젖는다. ‘밝게 빛나라 우리 인생 ♡’도 속절없이 젖었다. 여러 개의 가방들 중에 이런 날 하필 에코백이라니…. 어디 에코백뿐이었을까. 그리고 그게 어디 오늘뿐이었을까. 오늘 나의 드레스 코드가 굵은 털실로 성글게 짠 보라색 스웨터인 것처럼.


바람이 꺾어 온 투명한 진주알 같은 빗방울을 비즈 장식처럼 달고 신호등을 기다린다. 바람이 우산을 들고 선 사람들을 적신다. 빨간 신호등 앞은 일순간 물관을 뻗는 나무들로 빽빽한 숲이 된다. 발목을 타고 물기가 올라와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자 일제히 탕탕탕 횡단보도를 건너 나무들은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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