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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유지향 May 01. 2024

그녀 e

저녁 식탁에서였다. 그의 말에서 불현듯 그녀 e를 떠올리게 되었다.

피곤하다며 퇴근하자마자 티브이가 있는 문간방으로 직행하던 모습은 그날따라 온데간데없었다. 곧장 식탁에 와 앉더니 오늘 누군가 이사를 나간 것 같다는 말을 꺼냈다. 아침에 출근하는데 엘리베이터에 이사할 때 설치하는 보호막이 쳐져 있더라며 몇 마디를 더 식탁 위에 툭 던졌다.

식탁 유리 위에서 미끄러진 말은 한쪽 모서리 끝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저녁준비로 정신이 없던 시간이었다. 흘긋 돌아보니 분홍빛으로 은근하게 달아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저녁을 먹고 나서 늘 하던 대로 평소처럼 아파트단지를 한 바퀴 돌고 들어와 몇 마디를 더 거실에 쏟아놓았다. 이사 간 집이 내놓은 것 같다며 소파며 침대가 이름표를 달고 쓰레기장 한편에 나와 있다고 했다.


봄바람이 살랑대며 봄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사이 이삿짐 실은 트럭이 자주 눈에 띄긴 했었다. 얼었던 날이 풀리자 단단히 잠겨있던 그의 마음단추도 스르륵 풀리려는 듯했다. 그녀 e가 봄꽃 터지듯 다시 피어나려 한다는 직감이 왔다.

e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서였을까. 지나가듯 정남향이 아니어서 햇빛이 충분히 들어오지 않는다거나 내부구조가 별로라며 볼멘소리를 여러 번 흘린 적이 있었다. 지금 사는 집은 여섯 번 째로 이사했던 집과 달리 그녀가 커다란 거실창을 통해서는 물론이고 어디서도 전혀 내다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천만다행의 선택인데 남편입장에서는 아쉬운 선택이었던 모양이다. 어떤 여자가 집 안에서까지 자신의 남편이 품고 있을지 모를 이상형을 바라보게 허락하고 싶겠는가.


그녀 e를 처음 본 것은 전세계약만료를 두어 달 앞두고 있던 때였다. 여섯 번 째 이사를 앞두고 그는 마지막이라며 그녀 e를 보러 가자고 했다. 약속된 시간에 늦지 않으려 서둘러 저녁을 먹었다. 산책 나가는 것처럼 가볍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8월 한여름 더위는 해가 떨어진 뒤에도 낮의 열기가 식을 줄 몰랐다. 한두 걸음만 걸어도 땀이 흐르며 불쾌지수가 올라왔다. 내키지 않았지만 마지막이라는 말에 따라나선 길이었다. 그리고 십여 분 남짓한 시간 동안 e를 만나보고 돌아왔다. 그게 다였다.


기억을 거슬러 더듬어보니 그날 이후 내가 그녀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과는 달리 그의 마음한구석에는 e에 대한 꺼지지 않을 불씨가 확 댕겨진 것이리라. 그 짧은 시간에 섬광처럼 불꽃이 튄 지점이 어디였을지는 남편만 아는 비밀에 부쳐져 봉인되었을 것이다.

언제라도 e에게로 달려가 그녀의 편안한 품에 안기고 싶은 열망을 가슴 한가득 품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까맣게 몰랐다.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어 데면데면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큰일을 맞닥뜨리게 된 꼴이었다. 자신만만해하며 그는 내가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며 쌓아 올렸던 시간의 거대한 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새로 이사한 집은 e와 언제든 눈이 마주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었다. 집 안 주방이나 뒷베란다로 난 창을 통해 e의 모습이 훤히 내다보였다. 눈에서 멀어져야 마음도 차츰 멀어지게 되련만 눈에서도 마음에서도 멀어지기 힘든 거리에 그녀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그녀 곁을 자주 지나쳐야 했을 것이 뻔했다. 그녀를 눈앞에 두고 꼬박 삼 년 가까이 가슴앓이를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저 남자도 한 해가 다르게 부쩍 가을을 타는가 보네 하고 가벼이 지나쳐버렸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독감 같은 것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눈앞에 두고도 품을 수 없었으니 얼마나 그립고 안타까운 마음이었을까. 이사하고 그의 낯빛에 드리워진 그늘이 오래도록 걷히지 않았던 이유가 그녀때문이었을거라고 이제 와서 짐작해 볼 뿐이다.


그가 그녀 주변을 자주 서성거리며 맴돌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일곱 번 째 이사를 하고 난 후였다. 수상한 냄새에 개띠답게 예민한 후각세포를 가진 내가 단박에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려버렸다. 냄새를 좇다 보니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던 그의 행적들이 땅속 깊이 묻혀있던 고대유물처럼 발굴되어 나왔다. 끝까지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 자연스러운 풍화작용과 침식작용에 의해 의문의 실마리가 차츰 풀리게 됐다.

가족들과 외식을 하러 나가거나 병원 진료를 받으러 가야 할 때면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이유를 대며 굳이 e가 올려다보이는 곳에 차를 세워두곤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가족의 편의를 최우선하여 결정한 것이라고 강하게 항변하는 듯했다. 차에서 내려서는 먼저 가라며 혼자만 뚝 떨어져 걸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혼자 뒤돌아 마음 한 모퉁이에 꼭꼭 접어두었던 그녀를 슬쩍 꺼내 펼쳐보곤 했을 것이다.


이제 그의 얼굴은 웃음기라고는 없는데도 잔물결이 일렁거린다. 초저녁잠이 많아져 tv를 틀어놓고 잠들었다가 깨면 놓친 새벽잠을 이어 깁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는 날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부시럭대는 소리에 이따금씩 쌀 씻어 밥 안치는 소리가 섞여 들려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그녀 e를 오매불망 마음속에 품고 지내는 동안 오 학년이던 그는 육 학년이 되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에 가까운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가 언제까지 혼자만의 새콤달콤하고 쌉싸레한 연정을 품고 있을지 자못 궁금할 따름이다.

내년봄이면 여덟 번 째 이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녀 e를 영원히 이상형으로 가슴속에 묻을 것인지 아니면 더 늦기 전에 과감하게 정면돌파를 선택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눙치듯 슬쩍 이름에도 편한이 들어있으니 얼마나 아늑하겠느냐며 이번에는 그녀 품에 와락 안겨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말이라도 먼저 꺼내야 하나 고민 중이다. 풀린 의문의 실타래는 진즉에 동그랗게 말아 결혼할 때 장만했던 반짇고리함에 넣어두기로 마음먹었으므로.


그의 마음자리가 얼마나 넓은지 자로 재보지 않아서 정확한 평수를 알 수는 없지만 내 딸들을 보아 짐작하건대 못해도 천 평 정도는 거뜬히 되고도 남지 않을까 싶다. 천 평이나 되는 중에 그깟 서른네 평쯤 그녀 e에게 내준다고 무슨 큰일이 있을까. 빽빽하게 정수리를 덮었던 머리숱도 듬성듬성해진 마당에 그의 마음속 이상형쯤 눈감고 모른척해주는 것은 이제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아주 아량이 넓은 이십오 년 차 아줌마가 아니던가.

이참에 보란 듯이 그녀 e에게 나의 널디 너른 태평양 같은 혜량을 거하게 베풀어야 하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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