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자리 잡은 곳에서 꼼짝 않고 평생을 살기도 한다. 웬만해서는 붙박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줄 모르는 고집불통이다.
듬직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아기 같은 뽀얀 우윳빛 피부를 자랑했다.
등줄기가 후끈거리고 밤새 뒤통수에서는 열이 차올라도 가슴속만큼은 냉기충천하였다.
서늘한 냉정함과 꽁꽁 얼려버릴 차가움은 그가 목숨보다 먼저 지켜내야 하는 자존심이었다.
말이 없고 무뚝뚝한 그는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여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였지만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가슴을 열어젖히고 속속들이 속을 보여주었다.
가슴을 열어젖힐 때마다 반짝하고 불도 밝혀주었다.
잠이 오지 않던 어느 새벽 쿠르륵거리는 소리를 따라갔더니 그의 앞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늘 조용하던 그가 낮은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유통기간이 한참 지난 것들을 가슴에 품고 까무룩 정신을 잃기도 했던 것일까. 가슴안쪽은 검붉게 피멍이 들었다.
이젠 헐거워진 그의 몸이 놓쳐버린 투명한 피였을까. 어둠 속에서 바닥을 흥건하게 적셔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