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행복한가?
마을공동체에 참여한 사람은 다 그렇게 행복한가. 진짜 궁금하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소개할 때면 행복한 마을만 존재하는 것 같다. 아니, 동원된 것 같다. 우리가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라면 왜 그렇게 자살률이 높은 걸까.
“차라리 열심히 살지 말걸, 그냥 즐기며 살걸, 그러면 적어도, 적어도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을 텐데...” 이런 생각이 나를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육아로 인해 집에서 날마다 실패감을 맛보던 때였다. 둘째 아이를 출산한 후 깊어지는 우울감에서 나오기 위해 직장으로 나온 지 1년 만에 다시 발목이 잡혔다. 그리고 이번에는 완전히 사회적으로 나 개인의 인생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단정해 버렸다. 아이가 끝을 알 수 없는 치료가 시작되었을 때였다.
내가 마을에라도 나왔으면 행복했을 거라고? 맞다. 행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을 포기하지 않고 나 자신의 정체성이 있었다면, 동시에 육아도 잘할 수 있었다면 확실히 더 행복했을 것 같다.
낮시간 마을에서 가장 만나기 쉬운 사람은 육아맘, 육아 할머니이다. 육아하는 할아버지도 있겠지만, 잘 만나보지는 못했다. 육아하는 아빠는 간혹 만나기도 했다. 어쨌든 독박 육아맘, 육아 할머니에게는 별 특별한 것도 없는 ‘82년생 김지영’ 이야기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육아 때문에 일을 포기하는 것, 마을에서는 논쟁하기 쉬운 주제이다. 육아로 인해 낮에도 마을에 남아 있기를 선택한 엄마들은 두 갈래였다. ‘희생’이 아니라 ‘보람’이고 ‘당연한 일’이다. 반면 ‘나는 없고 아이와 남편만 있다. 내가 김지영이라서 실컷 울었다.’
마을에서 육아에 갇힌 사람은 단지 ‘젊은 엄마’만이 아니었다. 딸의 꿈을 위해 손주를 봐주기 위해 온 ‘친정 엄마’, ‘시어머니’ 중에서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분이 많았다. 손주를 봐주기 위해 도시로 아내가 떠나고 혼자 남은 할아버지가 우울증으로 삶을 끝냈다는 얘기도 있었다.
마을에서 개인적으로도 잘 알던 사람이 알고 보니 행복하지 않았고, 끝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모두 괜찮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 경제적인 삶도 나쁘지 않았다. 절대 자살할 것 같지 않은 종교인도 있었다. 자세한 통계는 모르겠지만 신앙을 갖고서도 자살하는 이가 많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남아있는 가족과 지인에게 자살한 사람에 대해 말하는 건 깊은 상처일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통계가 말해준다. 가족 구성원의 자살 이후 남은 가족은 엄청나게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겪는다는 것을. 헝가리 연구 결과를 보면 자살 유가족은 일반인보다 20배 이상 자살 충동을 겪는다고 했다. 우리나라 연구 수치보다 훨씬 높다. 정말 ‘자살’이라는 게 한국에서는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2012년 마을 옆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이 학교 앞 마트 4층 건물에 올라가 떨어졌다는 얘기가 들려왔을 무렵 나는 ‘헝가리 자살 전문가’의 강의 자료를 번역하고 있었다. 헝가리에서는 가족을 자살로 떠나보낼 경우 남아있는 가족은 일반인보다 28배 이상의 자살 위험에 빠진다는 통계를 갖고 있었다. 국가 캠페인으로 20년간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실시한 결과 자살률이 50% 감소했다는 것이었다. ‘당신도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으니, 힘들 때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문화를 만들어 간 결과였다. ‘관계’가 행복한 사람들은 자살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자살하고 싶다는, 나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험담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가 과연 마을에서 가능할까. 마을 만들기를 통해 그런 사람 한 두 명을 만날 수 있다면, 그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절망을 나눌 정도라면 그만큼의 신뢰가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마을 만들기의 핵심은 ‘관계 맺기를 위한 소통’이었다. 마을 만들기는 가족과 친구를 넘어 마을의 이웃 관계 안에서 새롭게 맺어지는 ‘신뢰’였다. 그리고 관계에서 맺어지는 소통의 깊이는 속상한 마음은 물론이고 ‘죽고 싶은 마음까지’ 터놓을 수 있는 수준까지였다.
마을공동체 활동을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났을 때 ‘행복’에 대한 생각은 점점 깊어졌다. 초기에는 모두가 부담 없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많이 했다. 마을공동체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요소가 무엇일까. 마을공동체 활동으로 인해 행복한가. 마을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의 요소는 뭘까. 행사는 행복하고 싶은 마을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육아맘도? 육아 할머니도? 아니, 우울한 사람도 마을행사에 오고 있는 걸까?
정직하게 말하면 마을활동가로서 너무 힘들었다. 보람은 있었지만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또 질문했다. 마을활동가는 행복하면 안 되나? 다른 사람만 행복하게 하면 성공인가?
마을활동가로 오래 일했는데,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본다. 사고를 당해 응급실에 실려 왔다. 병원비가 없을 때 병원비를 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곤궁에 처하면 열 일 제치고 달려와 도와줄 사람이 있는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웃 중에서 말이다. 자기 집 비밀번호까지 알려주면서 맘대로 커피 내려 마시고 쉬었다 가라는 사람도 있었다. 마을에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돈 들이지 않아도 행복한 일은 뭘까. 보조금 사업 아니어도 행복한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사람들과 생각을 나눠본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왜 우리는 보조금 사업이 있어야만 마을공동체 활동을 하고 있다고 믿는 건가. 아니 그렇게 행정에 보고되는 건가. 보조금 사업 안 하면, 우리는 마을공동체 활동 안 하는 마을인가? 이렇게 버젓이 항상 공동체로서 환경 운동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어쨌든 공동체 보조금 사업을 안 하면, 일단 행정과는 멀어진다. 마을공동체 단체에서 제외된다. 행정은 마을공동체 활동하는 마을만 관리할 의무가 있으니까. 열심히 자원봉사하고 있지만, 봉사 실적 없는 봉사자처럼 된다.
결론적으로 마을활동가는 적어도 보조금 사업을 해야 하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질문이다. 언제는 자립해서 알아서 살림하라더니... 그러니 마을이 이름 바꿔가면서 구성원 바꿔 가면서, 행정 주체 바꿔가면서 같은 일만 한다. 무늬만 다르게 초보적 수준에서 머무른다. 누구의 책임인가. 실적을 통합하지 않는 행정인가. 아니면 실적 중심의 행정을 이용하는 마을인가.
중간지원조직은 마을활동가를 소비하려고만 한다. 꺼내기 힘든 말이지만, 이미 활동가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다. 오래된 마을활동가들이 중간지원조직으로 자리를 옮겨 갔으니 껄끄럽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마을활동가들의 연대와 그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할 때 마을을 대신하여 마을활동가를 불러들이며 마을활동가를 점검하는데 익숙하다. 성과를 위해 마을활동가를 계속 대상화시키면 과연 파트너일까, 아니면 보조적 수단에 불과할까. 상생이 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마을활동가가 1,2년 차가 많다. 왜? 열정 페이 하다 실상을 알고 실망해서 자기 길로 가니까 그렇다. 다년차 공동체가 적은 이유, 열정 페이 하는 마을활동가가 없어서 그렇다. 보조금 사업을 하더라도 마을활동가가 너무 힘들지 않게 행정 시스템이 마련되면 좋겠다. 마을활동가도 행복한 마을공동체! 그것이 답이다. 지속성의 답이다! 행복한 마을활동가, 서로 지원하고 싶어 난리 나는 마을, 그런 마을 있다면 벤치마킹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