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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스랑 Oct 22. 2023

소중한 사람들

현자는 이제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다고 연락이 왔다. 생명이 위중하지 않고  뇌출혈이 잦아들고 있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이 병문안을 왔다. 생각지 못한 이도 있었다. 다른  동네로 청빙 된 예전 앵성교회 사모였다. 

 “현자 어르신, 하나님이 도우셨다 생각혀요. 앞으로  몸조심하고요. 큰일 날 뻔 했어라이.” 

“어찌께 알고 여기까지 왔데이? 오매 사모님, 참말 고 맙서라잉.” 

“다 하나님의 뜻이 있응께요. 우리는 부족허지만 현자 어르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기억하면 된다 아님니꺼.  사랑만이 남는 것이지여. ”  

앵성교회에서 시무할 때도 마을 사람이 아프면 사모는 바카스를 들고 병문안을 왔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병문안을 다녔다. 사모가 기도하면 현자는 휑한 마음이 잘 차려진 공짜밥 먹은 것처럼 흡족했다.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사모의 마음씀을 알고 고마워서라도 ‘이젠 교 회에 나가야지.’ 했었다. 그러던 차에 목사 가족이 다른  교회로 간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교회 재정도 안 좋은 데 불신자들 너무 챙겨 그리 되었다는 뒷말을 마을회관에서 듣고 현자는 남모르게 눈물을 훔쳤었다. 새로운 교회에서 잘 지낸다는 말을 듣자 현자는 마음이 밝아졌다.

“그람요. 사모님처럼 좋은 분을 만난 사람들은 참말  행복하것시오. 사모님 있었을 때 지도 교회 갔음 좋았을 턴디,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당께요. 다 늙고 병들어 왔다고 사람들이 흉볼까 봐 못 가겄시오. 그라도 집 에서는 만날 찬송 불러요.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지는 그 찬송을 들으면 마음에 평화가 온다니께요.”


막내며느리와 올해 대학에 입학한 손주가 왔다. 어려서 영재교육을 받더니 과학고등학교를 2년 만에 졸업하고, 명문대학에 진학한 손주였다.  

“우리 손주 왔냐. 사돈 어르신께 내가 항상 감사헌다.  니 엄마아빠가 이렇게 훌륭하게 널 키웠으니 내가 행복하고만이. 학비도 공짜고 학교에서 용돈도 준다면서?  공부도 좋지만 어찌든지 건강하거라.” 

 “제가 할머니 닮아서 그런 거예요. 고등학교 월반한  머리는 할머니, 아빠로 이어져 저한테 온 거에요. 할머 니는 초등학교를 두 번씩이나 월반하고 항상 일이 등이었다고 아빠가 그러시던데요.”  

“그때 공부랑 지금은 다르쟤. 니 아빠도 전국에서 한  명 뽑는 카투사 영어대회에서 일등했는디. 니도 그만침  밤잠도 안 자고 죽을똥살똥 열심히 했으니께 좋은 대학  간 것이지. 우리 건율이 덕분에 할매가 고맙데이.”


상냥한 며느리 덕분에 대가족이 모여 웃으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모두 모여 가족 여행도 다녔다. 다 며느 리 덕택이었다. 아이들 어렸을 때도 가보지 못했던 가족 여행을 갈 수 있어 좋았다. 누구라도 좋아할 만큼 생글생글 애교도 많고 사회성이 뛰어나다. 도시에서 자란 숙녀답게 하고 다니는 모양새가 세련되어 남들에게 내보이고 싶은 며느리다. 

"늘씬한 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브랜드 옷에 액세서리까지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깔맞춤을 하였고 스포티한 자동차까지 몰고 다녀. 엄마 좋겠네." 

딸이 그런 말을 할 때 아닌 게 아니라 어떻게 이런 도시 며느리가 시골 아이를 사랑하여 결혼하였는가. 손주까지 잘 가르쳤으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말을 알겠다. 


어떻게 알았는지 현자의 유일한 동서가 왔다. 시어머니라는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현자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어쩔 수 없이 함께 모여 드리던 제사도 끝났다. 각자  알아서 제 집에서 제사를 드렸었다.  

“얘들이 연락을 해줘서 알았어요. 진즉 알았으면 벌써  다녀갔죠. 형님, 건강하셔야죠.” 

“그려. 자네 집 식구들도 잘 살고 있쟤? 시아제가 워낙  똑 부러져서 조카들도 아들딸 낳고 잘살고 있을 거구만.” 

“그럼요. 다들 잘 있어요. 형님 쾌차하면 팔순 기념으로 다 같이 식사라도 한 번 해요.”

 “그러세. 그려.”  

현자는 뼈마디 굵은 손으로 동서의 손을 여러 번 쓰다듬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현자의 창가로 눈부시게 쏟아져 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자 현자는 광덕리 귀녀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동상, 만철이가 다녀갔다면서? 나도 병원에 입원힜다 나왔는데 미안혀. 형신이가 차로 델꼬 가야 가는디 눈코  뜰새 없이 바뻐. 동상꺼까지 농사일이 원체 많어야지." 

"성! 다 나섰어? 다행이네. 인자 너무 일만 허지 말고  몸도 좀 챙겨. 내 걱정 말고." 

큰 언니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고, 둘째 언니는 멀리 산다. 거동이 불편하니 왕래가 끊겼다. 미운 정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이 드니 귀녀 언니 원망하던 마음도 옅어졌다. 조카 형신이가 농사일을 많이 봐주고 왕래를 자주 하니 언니랑 고운 정도 들었다.  


깍듯한 사위가 손주 정이, 바깥양반과 같이 왔다. 인품이나 사회성으로 따지면 사위도 흡족하다. 딸은 전화 한 통 없어도 사위는 웃으며 반갑게 안부 전화를 자주 한다. 

 “나 지금, 니네집 간다. 지금 천안역서 전철 탔다.” 

 “네? 아니, 외출하고 집에 아무도 없으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오시고 싶으면 하루 전날이라도 미리 알려주세 요.”  

매번 그렇게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바깥양반을 사위는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는다. 맛집을 알아 놓고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물론, 두둑하지는 않지만 빈약하지도 않은 용돈을 챙기고 말동무가 된다. 이런 사위를 누가 싫다고 하겠는가.  

“우리 사위, 또 비싼 기차표 끊어서 정이까지 델꼬 왔네. 이제 안 와도 된다니께. 나땜에 고생이네. 내가 빨리  집에 가야혀. 이제 다 나았다니께. 내가 집에서 살살 있을 테니까 뼈도 잘 붙을 것이여잉.”

“어머님, 돈 걱정은 마시고 깨끗하게 다 나을 때까지  병원에 계셔요.” 

“그려. 아직 다 안 나았는디 집에 오믄 또 다칠 수 있으 니께. 그게 자식들 도와주는 거여.” 

바깥 양반이 사위와 같이 온 손주 정이에게 말했다.  

“니 할머니 머리는 참 비상혔다. 을매나 기억력이 좋은지 하나도 틀리는 게 없었고만. 계산도 시상 돌아가는  일도 눈치도 빨랐어. 그때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어찟 긋냐. 그래도 살았으니께 다행이고만. 그때 뇌수술을 시번씩이나 했는디. 그라고나니께 사람 성격이 달라져 버리드만. 뇌가 고장났으야. 이번에 거길 또 다쳐 부릿다니께. 근디 을매나 다행이냐. 즉사를 안혔으니께. 을매나 다행이여. 다시 집으로 갈 수 있으니 참말이지 하늘이 또 도운 거여.”  

“네. 아버님. 하늘이 매번 아버님과 어머님을 돕네요. 이번에도 경운기 몰고 집에 오셨다가 피 흘리는 어머님을 발견하셨다면서요? 뒤늦게라도 옆집 차로 서둘러 병원에 갔으니 얼마나 다행이었어요?  제가 막 장가 왔을 때요. 아버님 새벽에 고구마 팔러 가다 경운기 사고 나셨는데, 안 돌아가셨잖아요. 경운기 사고는 거의 그 자리에서 즉사라는데, 모래더미에 떨어진 것이 천운이었죠. 다치긴 했어도 건강하게 회복되셨으니까요.”


 “그라고 보니 자네 말이 맞네. 우리 박 씨 집안이 참 큰일이 많았는데, 용케도 하늘이 도와 우리가 다 목숨을  부지했어. 영숙이도 어렸을 적 도수로에 빠졌는데 살았지. 큰 아이들이 도수로 빨래터에서 놀고 있으니까, 어 린 마음에 가고 싶었는가비. 이끼를 밟아 쭉 미끄러져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닌가잉. 동네 젊은이가 둥둥 떠내 려가는 아이를 얼른 구해서 우리가 넥타이를 선물했었지 아마.  막내 재영이도 도수로에 빠졌었네. 재영이 때는 도수로 공사를 한 후라 물살이 참말 거셌어. 우리 내외는 경기도 가서 일당 받고 모내기하느라 집에 아무도 없었을 때였네이. 갸가 공중도수로에 빠져 부릿으니까, 영락없이 죽는 줄 알았다니께. 동네 애가 우리 집에 사람 없는 걸 보고 얼른 작은 집으로 뛰어갔고, 작은 집 준환이가 마침 집에 있어서 재영이를 구했는데, 숨을 안 쉬니까 인공호흡을 했어. 그라고 살았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우리 애기 살려주소.” 하면서 그 먼 데까지 버선발로 달렸다지. 을매나 정신이 없었는지 신작로 돌짝에 버선이 다 헤지고 발바닥이 피가 나도록 다쳤는디도 모르고 말여.  큰 애 영환이도 그랬구만. 갸는 두 번이나 물에 빠졌지. 한 번은 여름 모내기철 도수로였고, 또 한 번은 한겨 울 구개강에 빠졌어. 얼음 타다 빠졌는데, 오매, 얼음을  갸가 썰매 송곳으로 뚫어서 나왔다니께. 참말 영특한 아이였쟤. 참말 우리 집안은 하늘이 도운 거여.”  


사위와 바깥양반의 얘기를 조용히 듣던 현자는 아이들을 잃을 뻔한 인생의 고비마다 은총이 있었음을 알게 되 었다. 현자는 20년 전 마을 회관에서 정신을 잃었다. 칠 내내 두통이 심했는데, 그날은 바깥양반도 아이들 집에 다니러 서울 가고 없었다. 회관에 잘 가지 않았는데,  그날은 회관에 가서 동네 사람들과 화투를 쳤다. 현자는  화투를 치다가  

“아이고, 머리가 지독히도 깨질 듯 아프네. 너무 아퍼.” 

그러면서 쓰러졌다. 입에서는 거품이 일었다. 동네 사람들이 119에 신고해 현자는 곧장 대학병원으로 이송 되었고 무사히 생명을 건졌다. 동네 사람들이 없었다면,  혼자 집에 있었다면 지금 현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까지 20년을 더 살았다는 생각이 들자 현자는 그 옛날 이평초등학교에서 공부를 처음 시작 한 날처럼 얼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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