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어렸을 적에

by 조이스랑

엄마 어렸을 적에


“엄마, 우리 집은 구석기야.”라고 하니,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은 모두 뺐다. 뺄 것 다 빼고 나니 그나마 국민학교 시절이 나은 것 같다.


다른 친구들보다 2년씩이나 빨리 학교를 다녔던 터라 키 작고 어린 나의 별명은 ‘꼬맹이’였다. 꼬맹이는 늘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뭘 하며 살까 싶었지만 빨리 어른이 되어 버스를 타고 멀리멀리 가고 싶었다.


아침 등굣길에는 동네 언니, 오빠, 동생들과 긴 대열을 만들어 줄을 서서 수다를 떨었다. 이슬이 내릴 때는 날지 못하는 잠자리를 잡아 옷깃에 누가누가 길게 늘어뜨릴 수 있나 내기를 하고, 산딸기와 야생 열매를 따먹기도 했다. 하굣길에는 시간이 많았기에 개구쟁이가 되었다. 친구들과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 사과, 밤 서리를 하고, 뽕나무 숲으로 들어가 입술이 검댕이가 되도록 오디를 따먹었다. 배가 부르면 빈 도시락에 오디를 가득 채우고 “이놈들아” 하는 소리에 냅다 줄행랑을 쳤지만, 날이 지나면 또 뽕나무 밭에 살금살금 들어갔다.


집에 돌아오면 가방은 툇마루에 던져놓고 종일 친구들과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땅따먹기를 하며 놀았다. 쑥이나 나물을 캐다 보면 덤불 속에서 뱀이 나와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시골 여자아이라면 당연히 나물을 캐어 집안일을 도왔다.


친구들이나 동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늘 개구쟁이였고, 말 짓을 많이 한다고 어른들은 야단이었다. 딱히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같은 건 없었다. 동네 뒷산에서 놀다 배가 고파지면 언저리에 땅을 파 아궁이를 만들었다. 불을 지피고, 깡통에 쌀을 구워 먹는 것도 하나의 놀이였지만, 우리끼리 만들어 먹는 맛있는 간식이기도 했다. 쌀을 굽기 위해서는 늘 나뭇가지에 돌돌 말을 비닐을 찾아다녔다. 비닐이 타면서 촛농처럼 떨어지는 걸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나뭇가지의 비닐이 모두 불에 타 녹아지면 다시 비닐을 씌워 불을 계속 지펴야 우리의 맛있는 간식이 계속 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바람이었다.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홱 달라져 잘못 나뭇가지를 다루면, 뜨거운 불에 녹은 비닐 방울이 손에 떨어져 화상을 입었다. ‘앗, 뜨거’ 비명을 질러도, 약은 바르지 않았다. 데인 피부는 부풀어 오르다 물이 잡히고, 몇 날 지나면 피부가 벗겨지다 아물게 된다는 것을 다 알았기에 우리의 놀이는 계속되었다.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우거진 숲도 친구들이 있을 때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풍뎅이가 잘 잡히는 나무 밑으로 몰려가 풍뎅이를 잡았다. 날아가지 못하게 다리를 부러뜨린 후 빙빙 도는 풍뎅이가 몇 바퀴나 도는지 서로 경쟁하며 시끄러웠다. 공부 같은 건 하지도 않았고, 놀기만 했다. 단 한 가지, 일기는 꼬박꼬박 써야 했다. 선생님께서 항상 검사를 하셨기에.....


3학년이 되면서 노래를 잘했던 나는 합창반이 되었고, 독창 부를 도맡아서 늘 연습이 많았다. 학기 중에도, 방학 때도 합창반 연습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동무 없이 혼자일 때가 많았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 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몰래 놓고 도망갔대요."


집으로 돌아가는 기나긴 시간 동안 무서움을 달래며 배운 노래를 흥얼거렸다. 지금도 넓고 넓은 호남평야의 하늘에 드리웠던 흰 구름과 신작로를 따라 줄지어 서 있던 이름 모를 나무들이 떠오른다. 때로 ‘나는 이렇게 공부도 못해서 어른이 되면 어떻게 살까’ 눈물짓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2년이나 일찍 학교에 입학해서 3학년이었어도 겨우 8살밖에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조숙했던 것 같다. 아무도 없나 두리번거리고, 나 혼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종종 즉흥 자작곡을 부르며 외로움을 달랬다.


학원도 드물던 시절이었지만, 부모님은 ‘땅 파먹고 살지 않으려면 공부하라’고 하셨다.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지만, 오빠들보다는 못했기에 1등 하지 못하는 나는 괴로웠다.


선생님은 무서웠다. 아침부터 시뻘게진 얼굴의 선생님은 어떤 날은 4시간 동안이나 화장실에 보내지도 않고, 벌을 세웠다. 반 아이들 전원이 영문도 모른 채 벌을 많이 받았다. 뺨을 맞아 고막이 터진 동네 아이 소문도 있었다. 그때는 벌이 너무도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장학사가 오는 날이면, 교실 바닥에 초를 문지르며 광이 나게 닦았다. 창틀에 먼지 하나 없어야 했고, 유리창은 반짝거려야 했다. 호호 입김을 불어 신문지로 닦고 또 닦아 선생님의 ‘통과’ 허락이 떨어져야 집에 갈 수 있었다.


가장 쉬웠던 시간은 음악 시간, 가장 힘든 시간은 미술 시간이었다. 성격이 급한 탓에 사물을 관찰하지도 않고 빨리빨리 그리고, 칠하고, 남은 시간은 쭉 놀았다. 다 그린 사람은 아무리 못 그렸어도 제출만 하면 놀아도 되었다. 내 작품이 교실 뒤 환경 판에 걸린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음악은 나의 세계였다. 어른들이 초대된 잔치에서 나는 학교 대표로 독창을 불렀다. 읍내에서 열리는 학교별 음악대회에서 늘 독창 부를 불렀고, 우리 학교는 항상 입상을 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나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셨다. 쓸데없는 피아노는 왜 배우냐고 주산 학원에 보내셨다. 한 달 배우고 그만두었다.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는 특별했다. 잔디 씨앗을 모아 오는 것이었다. 긴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열심히 숙제를 했다. 왜 이런 숙제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열심히 숙제를 제출했다.


단체 활동도 특별했다. 늦은 가을이 되면 솔방울을 따러 선생님들과 같이 단체 활동을 했다. 집에서 가져온 커다란 비닐 포대를 들고 숲을 누비고 다녔다. 그래야 겨울 땔감으로 솔방울을 쓸 수 있었으니까. 본격적인 추위가 닥치기 전에 예외 없이 솔방울을 가득 채워 학교에 제출했다. 겨울이 되면 우리가 땄던 솔방울을 태우며 난롯가에 모여 도시락을 데웠다. 제일 밑 칸에 놓이면 너무 뜨거웠고, 제일 위칸이 되면 미지근해서 밥 먹기가 고약스러웠다. 그래도 동무들이 있어서 좋았다. 눈이 무릎까지 올라올 정도로 무섭게 눈이 내려도 결석은 허락되지 않았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결석은 없었다. 부모님께는 개근 외에 다른 세계가 없었다.


가족은 내게 인생의 거친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것이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린 나는 빨리 어른이 되어 다른 세계를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이 지나갔다.


*사춘기 딸에게 갱년기 엄마가 쓴 글, [엄마의 개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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