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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Feb 24. 2022

샤토브리앙을 찾아서

사진 : 보방의 성채

 거무수레한 돌덩이 도시 생말로를 떠난다. 그랑베의 샤토브리앙 무덤을 둘러보지 못하고 아쉽게 출발한다. 해물 모둠요리와 가자미구이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결과다. 마음이 급해 도시 전체를 철옹성으로 에워싼 성벽에 잰걸음으로 오른다. 사진 몇 장 찍고는 먼발치서 그랑베를 바라본다. 어린 시절 샤토브리앙이 또래들과 놀던 해변이 넓게 펼쳐지고, 갯벌을 걷거나 일광욕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해적선을 많이 좌초시켰을 암초들이 여기저기 시커멓게 다닥다닥 붙어있다. 보방이 바위섬 위에 건축한 난공불락의 성채도 저기 보이고, 파도의 위세를 누그러뜨리려고 심어둔 나무 말뚝들도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다. 샤토브리앙이 청소년 시절을 보낸 콩부르가 적힌 표지판이 눈에 띈다. 사 년간 행복하게 중학교를 다닌 몽생미셸 어귀의 돌(Dol) 드 브르타뉴란 지명도 지나쳤다. 돌은 가는 날이 장날이라 시골 시장을 재미있게 구경했다. 거무티티한 화강암으로 지은 거대한 돌의 성당도 기억이 생생하다. 생말로에서 가면 강물 따라 난 계곡길이 참 아름다운 중세 도시로 시장터 가게들이 아기자기하니 고풍스러운 디낭도 볼 만하다.

샤토브리앙

 맨 처음 생말로에 왔을 때는 밤이었다. 성벽 꼭대기까지 밀물이 들어와 있었다. 두께로 미루어 성벽을 제대로 보지 않아도 무척 견고하단 걸 단박에 알고도 남았다. 해적들이 지레 겁에 질려 성벽을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을 성벽을 거닐며 온통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금세  파도가 성벽을 타고 넘어올 기세였다. 이튿날 물 빠진 시간에 갯벌이 된 바다를 걸어 그랑베로 갔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만 들려오는 대서양을 향해 이름 없이 십자가만 꽂힌 무덤은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다 아는 생말로 출신의 위대한 작가 샤토브리앙이 그 주인공. 그가 어느 정도 대단한 사람이냐고. 그 보다 유명세로 치면 한참 위인 빅토르 위고가 어린 시절 "샤토브리앙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떠받들던 이가 바로 그다. 유학 초기에 동문 몇이 어울려 떠난 여행이었다. 그때 우리들의 문학을 향한 참신한 열정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샤토브리앙 광장과 정면이 샤토브리앙 호텔

 온통 거무죽죽한 화강암으로 지어진 성채 도시 생말로를 보고 받은 인상은 하도 강렬해서 아직도 감흥이 새롭다. 물론 지금의 구시가지는 이차대전 뒤 많이 복원한 모습이다. 아무리 대단한 광경이라도 되풀이해서 보면 감동은 줄어든다. 여행 떠나기 전 안 가본 곳을 상상으로 그려보는 풍경이 훨씬 풍요롭고 아름답다! 그야말로 네르발의 "신기한 지리책"이다.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쳐진 해적의 본거지 생말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실망한 곳은 하이델베르그다. 머릿속에 아름다운 이미지를 비춰주던 마술 거울은 현장에서 하나둘씩 금이 가버렸다. 생각보다 나았던 곳은 스트라스부르다. 그렇지만 나한테 생말로를 떠올리게 하는 건 바로 그랑베의 주인 샤토브리앙의 작품이다. 그 멀리 있는 그랑베를 두 번 가보았는데도, 발레 오루(늑대골) 바로 가까이 살면서 육 년이 지나도록 그가 십 년 가량 머물렀던 그 집 방문을 아직도 미루고 있다.

샤토브리앙의 무덤이 있는 그랑베

 몰락한 귀족 출신의 후예 프랑수아 드 샤토브리앙. 가문의 영광을 되찾는 데 온 삶을 다 바친 무뚝뚝하고 폭군적인 그의 아버지가 전쟁 시는 해적으로 평화시는 노예 무역이나 대구잡이 어부로 한 재산 모아 백작 작위와 함께 콩부르 성을 사들인다. 미신적인 어머니는 약골이나 신앙심이 깊고 쾌활하며 교양이 풍부한 인물이다. 육 남매의 막내 프랑수아는 삼 년 동안 세 번씩 인생 항로를 바꾸는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콩부르에서 보내다 열일곱에 보병 장교로 임지로 가는 길에 파리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 뒤 파리 사교계를 주름잡던 당대 최고의 미녀 레카미에 부인을 만난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몇 십 년 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를테면 단테의 뮤즈 베아트리체다. 루브르의 신고전주의 전시실에서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맞은편에 걸려 있는 다비드의 미완성 걸작 초상화의 주인공이 바로 샤토브리앙의 영원한 여자 친구다.


 생말로의 샤토브리앙 광장 한편에 샤토브리앙이란 호텔이 있다. 생가가 아니고 세 살 때 유모 곁을 떠나 생말로로 돌아와 콩부르로 가기 전에 살던 곳이다. 근처에서 점심을 먹은 뒤 커피를 마신 곳이 이 호텔 카페다. 참석한 누구도 샤토브리앙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굳이 내가 그들을 이쪽으로 유도한 까닭을 모를 테다. 작가로 보단 샤토브리앙 안심 스테이크로 더 친숙한 이름이었을 테니까. 처음 생말로에 왔을 때 이 건물을 방문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해적 박물관처럼 꾸며놓았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하다. 생말로를 떠나 디낭을 구경하고 생말로 다음 거처로 고독한 청소년기를 보낸 콩부르를 방문했다. 너무 늦게 도착해서 콩부르 성 내부는 방문하지 못했다. 그다음 가족 여행 때도 디낭을 거쳐 콩부르를 지나쳤지만 역시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개방이 안 되는 한겨울에 가서 그랬지 싶다. 하긴 샤토브리앙도 열일곱에 보병 중위로 임지로 떠나면서 다시는 콩부르에 살지 못한다. 그해 구월 그의 아버지가 죽자 그의 어머니는 생말로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콩부르로 되돌아가 살 기회가 영영 사라진다. 프랑스 대혁명이 과격해지자 그는 형과 함께 프랑스를 몰래 빠져나가 비참하게 떠도는 망명객이 된다.

발레오루의 샤토브리앙의 집
다비드, 스무 살의 마담 레카미에의 초상, 루브르

 [르네]의 주인공이 고뇌에 가득 찬 청소년기를 보내는 무대가 된 콩부르. 가을 저녁 부들과 수련, 갈대가 다복한 연못에서 쪽배를 저어면서 떼 지어 날아가는 철새를 보며 먼 곳을 떠올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청년 시절의 불안과 고독, 멜랑콜리가 뒤섞인 모호한 감정 상태를 잘 묘사한 [르네]는 바로 낭만주의 전주곡이다.


 특히 속내 얘기를 나누며 동무처럼 자란 네 살 위 누나 뤼실과는 관계가 근친상간이라 할 만큼 묘하다. 정작 1781년 다섯 달 동안의 북아메리카 여행에서 돌아와 1792년에 결혼한 셀레스트는 줄곧 건전한 친구 또는 현명한 조언자로만 남는다. 샤토브리앙은 결혼 뒤 바로 망명의 길에 올라 십 년이 지나서야 셀레스트 앞에 다시 나타난다. 십 년 지중해를 헤맨 율리우스처럼 샤토브리앙이 밖을 떠돌 동안 셀레스트는 뤼실과 함께 돌아올 남편을 기다린다. 그 사이 샤토브리앙은 여러 명의 여인들과 연애를 한다. 그의 두 누나 쥘리와 뤼실이 합쳐져 [르네]에서 아멜리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1786년 처음 군인으로 사회에 발을 내디뎠을 때 샤토브리앙은 휴가를 내어 누나들의 차맛 폭에 싸여 중세 도시 푸제르에서 빈둥거리며 지낸다. 그 한량도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는 비껴가지 못한다.
 
 프랑스 대혁명기를 사는 청년한테서 뭐라 꼬집어 설명하기 힘든 불안과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억누를 수 없는 정열은 과연 어디서 오는 걸까. 귀족이 자신이 발붙일 터전이 사라지면서 느끼는 위기 의식일까. 아니면 영혼을 달래주던 가톨릭 종교의 효력이 떨어져서 일까.
 샤토브리앙은 사랑의 감정도 먹고 살 게 있어야 생기는지라 사랑은 할 일 없는 유한계층이나 하는 거라고 본다. 중세의 영주와 기사에 뿌리를 둔 귀족 계층은 왕권이 강화되면서 점점 자신의 자리가 쪼그라든다. 극단적으로 절대왕정이 들어서자 귀족들은 상승하는 부르주아에 밀리기 시작하여 허수아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좋은 자리가 부르주아한테 다 돌아갔으니... 중세가 막을 내리며 귀족들은 이미 떠돌이 기사가 되어 있었다. 가리 늦게 기사가 되어 보겠다고 나선 돈키호테라는 방랑 기사를 잘 알고 있다. 타고난 “떠돌이 기사” 샤토브리앙도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1811)에서 "19세기에 중세의 성지 순례자로 뒤늦게 동방 여행을 떠난다"라고 밝힌다. 


 귀족들의 영지는 쪼그라들거나 빼앗겼고 중세의 화려한 십자군 원정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가진 재산이 없는 귀족은 가문의 빛 바랜 문장 하나로만 버틸 수는 없는 일. 더욱이 자신들의 신분이라도 보장하던 왕이 사라졌을 때 귀족들이 느낀 감정은 과연 어땠을까. 아무런 방패막이가 없어지고 경제력도 없이 방랑하는 기사로 전락한 심정은 싸워보기 전에 패배를 인정하는 검투사 꼴이다. 사회 진출의 기회가 원천 봉쇄되고 탈출구가 없는 막막한 젊은이는 가상의 도피처라도 찾아야 한다. 그게 여인이든 자연이든 여행이든 암울한 현실에서 헤어날 비상구가 필요하다. 멜랑콜리와 모호한 열정에 빠져 번민하는 상태, 이런 걸 두고 세기병이라고 한다. 비단 프랑스 대혁명 뒤에만 나타나는 특수 현상은 아닐 테다.
 
 샤토브리앙의 작품에서 시각적 체험이 과거를 되살리는 무의식적 기억은 촉각이나 미각을 매개로 과거를 떠올리는 프루스트식 무의식적 기억과 흡사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추운 겨울날 우려낸 차에 적셔 마들렌 과자를 한 입 베어 물자 콩브레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만화경처럼 떠오른다. 일차 대전이 한창일 때 오랜만에 옛 사교계를 다시 찾은 댄디 마르셀은 그 집 마당의 울퉁불퉁한 포석 때문에 약간 기우뚱하자 마술램프 켜지듯 과거가 되살아온다. 샤토브리앙의 무의식적 기억은 특히 시공간을 초월하여 연상망을 만든다. “몇 번이고 아메리카의 숲 속에서 해지는 광경을 보자 콩부르 숲이 떠올랐다.” [브라질 여행기]에서 장 드 레리(Jean de Léry)는 마니옼가는 냄새를 통해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프랑스에서 그 먼 붉은 나무란 뜻의 브라질로 곧바로 옮겨간다. 카니발의 밤 해먹에 누워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데 인디언 친구가 불에 거슬린 사람의 팔 하나를 들고 와 먹어보라고 들이민다. 네르발은 생제르맹의 카페에서 기타를 퉁기며 노래하는 젊은이를 보고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전쟁터에서 아내를 잃고 혼자 살아 돌아온 자신의 아비가 아내를 그리며 기타를 치면서 [사랑의 기쁨]을 읇조리던 모습을 떠올린다. 돌도 지나지 않은 아들을 버리고 간 네르발의 엄마는 나폴레옹 군대의 군의관인 남편과 합류했지만 폴란드 땅에서 젊은 나이에 열병으로 죽는다. 이렇게 감각을 통한 기억은 시공간의 벽을 허물며 과거를 현재로 마술처럼 되살린다.
 
 샤토브리앙은 가톨릭 지상주의자에 정통 왕당파이다. 루소의 추종자인 그는 신을 믿지 않고 귀족의 특권을 주장하는 중세 봉건적 사고를 가지나 독재 절대왕정에는 반대한다. 어떤 권위나 구속에도 결코 굽히지 않는 자유스럽고 독립적인 그는 오히려 미국의 새 민주주의 사회에 공감한다. 탈출에 실패한 루이 16세를 구할 일념으로 북아메리카 여행 도중에 급히 돌아온 샤토브리앙은 콩데 공이 이끄는 왕당파 군대에 들어간다. 승산 없는 혁명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데다 천연두까지 걸려 해산된 왕당파 군대의 패잔병으로 삶과 죽음을 오가는 망명길을 떠난다. 프랑스 대혁명 때 그의 어머니와 두 누나가 체포당한다. 1794년에는 그의 유일한 형이 부인과 처가족 몇 명과 함께 단두대에 처형당한다.

 
 샤토브리앙은 1793년부터 칠 년 동안 영국에 망명한다. 여전히 마마병에 시달리며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간다. 병에서 회복되자 프랑스어 개인 교습과 번역으로 겨우 목구멍에 풀칠하며 어렵게 보낸다. 곤궁한 망명 시절에도 그는 문학적 열망에 불타 끊임없이 글을 쓴다. 이게 나중에 [기독교의 정수]가 되는 원고다. 이 책의 일부로 포함된 [아탈라]와 [르네]가 먼저 따로 출판하면서 그는 그야말로 혜성같이 문단에 데뷔한다. 오늘날로 치면 떠오르는 대중 스타가 된다. 나폴레옹 집권 초기에 그한테 발탁되어 외교 사절로 등용된다. 그 뒤 콩데 가문의 마지막 적자 앙겡 공작을 총살한 나폴레옹에 맞서면서 마담 드 스탈과 함께 반 나폴레옹 파가 된다. 나폴레옹의 미움을 사 둘 다 파리에서 거주 못하고 파리에서 십오 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쫓겨난다. 왕정이 되돌아오자 그는 정계로 진출하여 오랜 세월 외교관으로 활동한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줄기차게 부르짖는다. 1830년 칠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부르봉의 방계 루이 필립이 시민의 왕으로 추대되자, 상원에서 루이 필립을 서출 정권이라 규정하며 루이 필립 옹립을 결사반대하고는 정계를 떠난다. 어떻게 보면 샤토브리앙은 부르봉의 샤를 10세 가족보다 훨씬 더한 골수 급진 왕당파이다.


 말년에 샤토브리앙은 최고의 걸작 [무덤 저편의 회상]이라는 제목으로 자서전 집필에 몰두한다. 원래 죽은 지 오십 년 지나 출판할 셈이었지만 살았을 때 이미 일부가 발표된다. 판매 부수를 늘이기 위한 그럴듯한 광고 전략일지도 모른다. 굳이 그는 서문에서 경제 사정 때문에 일부를 미리 출판한다는 핑계를 앞세운다.
 샤토브리앙의 이미지는 19세기 불문학 교과서에 실린 살짝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휘날리는 멜랑콜리한 초상이 낭만주의의 선구자답게 번민하고 우수에 찬 모습으로 뇌리에 생생하게 박혀 있다. 지로데의 1808년 초상으로 생말로의 역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분명 이상화된 이미지일 테다.

 
 루브르의 신고전주의 전시실에는 역시 지로데가 그린 [아탈라의 매장](1808)이 걸려 있다. 암굴 같은 곳에서 인디언 칵타스가 슬픔에 찬 얼굴로 아탈라의 다리를 부여잡고 선교사 오브리 신부가 숙연하게 어깨를 부축하여 축 늘어진 아탈라의 시신을 구덩이로 내리려는 참이다. 무대 장치만 좀 바꾸었을 뿐 종교화에서 "예수의 매장"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이국적인 배경에 기독교적인 주제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 배합되어 낭만주의를 예고한다.
 
 지금 전세 버스를 타고 루아르의 고성 지대를 향해 달리고 있다. 다음 행선지는 앙부아즈. 프랑스 르네상스가 꽃피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죽기 전 삼 년 남짓 살던 곳으로 간다.


지로데, 아탈라의 매장, 루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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