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8.22
9:45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11:30에 미용실 약속이 있었다. 그 전에 루브르를 거쳐갈 생각이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가슴이 여전히 쓰리긴 해도 포기했다고 생각하니 부담감이 덜해졌다. 그래 이젠 포기다.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품었다. 혹 거기 있을지도 몰라.
아무리 어제 일을 짜맞추려고 애써도 어느 순간 아이패드가 사라졌는지 재구성할 수 없었다. 1호선 두 구간을 가는 동안 사람이 많지 않아 서로 부딪힐 일도 없었다. 복잡하지 않은 메트로 안에서 가방끈을 잡고 서 있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지퍼를 열고 제법 묵직한 아이패드를 빼내갈 수 있었을까. 1호선 전철에서 당했다면 그 소매치기는 신에 가까운 재주의 소유자다.
그렇담 루브르에서 사라졌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내놓지 않았는데... 한 가지 의심가는 점이 있다. 짐 검사를 통과하는데 처음 나타난 젊은 청년 직원이 내가 쓴 베레모를 벗어보여달라고 몇 번 주문했다. 새로운 규칙이냐고 농담조로 건넸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상식을 뛰어넘는 사건이었다. 모자를 벗어보여달라는 직원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그 사이에도 난 가방을 한손으로 잘 움켜쥐고 있었다. 잠시 주의가 흐트러졌을 때 뒤따라오던 어떤 녀석이 슬쩍해갔나.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이 역시 신출귀몰할 일! 어쨌든 모자를 두어 번 들어올려 보이는 어색한 시늉을 했고 저도 모르게 마음의 동요가 일어났다. 이 녀석이 대체 무슨 일로 모자를 벗어보이라고 하나!
단 한 명이라고 생각하고 집을 나서면서 툴툴거렸다. 막상 만나보니 둘이었다. 성수기 끝물이라도 한 명 델고 투어 진행하기는 좀 그렇다. 다들 여섯 꽉 채워 일할텐데. 손님이 예약한 날짜가 7월초였다. 꽤 오래 전 예약한 셈. 그 사이 추가 신청이 없었다. 어쨌거나 초심으로 되돌아가 한 사람이라도 열심히 하자고 맘을 다잡았다. 그나마 둘이 됐으니 다행이지.
짐도 맡기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는다니 바로 시작했다. 바깥에서 사진을 찍어주려다 잊고 그냥 들어오고 말았다. 안에서 한장 찍어드릴게요.
아 참 이거 하나 받으세요. 한글로 된 안내도입니다. 아이패드와 같은 칸에 넣어둔 안내도를 꺼내 건넸다. 집에 남아 있는 안내도를 챙겨둔 거였다.
박물관은 우리가 있는 유리 피라미드 아래 광장에서 들어가고 나오면 다시 여기가 됩니다. 이 가운데 있는 기둥이 어디서나 잘 보여요. 이걸 기준점으로 삼으시고 저쪽 복도가 출구입니다. 천장에 여러 나라 말로 출구를 적어둔 거 보이시죠. Sortie, Exit, Salida! 거꾸로된 피라미드가 박물관 바깥이에요.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건물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가 나오고 또 메트로역으로 가는 통로가 나옵니다. 직진을 죽하면 올라가는 계단이 양쪽으로 나오는데 올라가면 아까 봤던 공원쪽 개선문이 나와요. 어느쪽으로 가더라도 내부는 다 통하게 돼 있습니다.
박물관 바깥 지하는 상가로 돼 있어요. 식당, 카페, 옷가게, 오락실 등 갖가지 가게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박물관 나가기 전 왼쪽 복도 끝이 기념품 가게입니다. 안에도 있는데 이쪽이 가장 큽니다. 기념품 살 거 있으면 여길 가세요. 박물관 관련 제품만 있는 게 아닙니다. 생활 용품도 있어요. 컵, 찻잔, 식탁보, 에코백... 여자분들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 장신구도 팔아요. 옛날 나침반, 볼록거울, 돋보기 등해서 재밌는 게 많아요. 기념품 사지 않더라도 쓱 한번 둘러보세요.
그리고 뒤돌아보세요. 우리 앞쪽에 그룹이라고 적힌 데 보이시죠. 저기가 화장실이에요. 화장실 표시 없어도 있어요. 저 보세요. 화장실 표시 있는데 가지 마시고 저길 가세요. 어쨌든 저쪽이 다른데보다 사람이 적어요.
그럼 서론을 줄이고 바로 입장할게요. 남들보다 한 발짝만 먼저 들어가면 훨씬 유리해요. 사람들이 적어서 관람하기 쾌적해요. 입장권 화면으로 띄워주시고 들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줄서서 짐검사하러 들어오던 곳이 시내쪽 건물이고, 오른쪽이 피라미드 뒤쪽 건물이 막힌 부분입니다. 모나리자 사진 보이는 데가 센강쪽 건물이죠. 크게 보자면 디귿자형인데 우리는 시내쪽 건물 리슐리외관으로 들어가서 가운데쪽으로 갔다가 반대쪽 센강쪽 날개쪽에서 마칩니다. 걷는 거리가 3킬로 정도에요.
이때까지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낼 필요가 없었다. 나폴레옹3세의 아파트에서도 꺼내보여주는 자료 사진이 없어 꺼내지 않았다. 나폴레옹3세의 아파트를 빠져나오면서 프랑스 조각실을 얼핏 보여주었다.
아까 들어오면서 사진으로 얼핏 보신 마를리의 기마상입니다. 안 보이지만 바로 아래쪽에도 있어요. 근데 콩코드 광장에서 샹젤리제가 막 시작되는 들머리에 양쪽으로 설치돼 있습니다. 그게 복제본이고 이게 원본입니다.
메소포타미아관 들어가기 전 다시 프랑스 조각 전시실 보여드릴게요. 짐검사 하러 가던쪽이에요. 저기 가운데 세 사람 구경하는 조각보세요. 고대적 영웅으로 올림픽 경기에 나가 금메달 네 개, 아폴로 축제 경기에서 금메달 여섯 개 땄던 영웅이 나이가 들어 왼손이 참나무 틈에 끼었어요. 젊은 시절 생각하고 빼려니 안 빠지는 겁니다. 잘 안보이지만 뒤에 들러붙은 게 사자에요. 사자가 들러붙어 오른손을 물어뜯고 있어요. 나이들면 이렇게 된다. 조각가가 절대왕권을 휘두르던 루이14세한테 경계의 뜻으로 갖다받쳤을까요. 밀론이라는 고대적 영웅이야기입니다.
근데 우리 앞에 현대 작품이 하나 있어요. 2020년에 제작된 거에요. 한번 찾아보시겠어요. 재미로 한번 찍어보세요. 아 저 까만 기마상, 루이14세로 17세기 거에요. 이 앞에 시퍼런 거, 그것도 옛날 거에요. 저기 위쪽에 하얀 조각, 그것도 옛날 겁니다.
정면 유리창 세 개입니다. 시커멓게 칠해진 거에요. 루브르의 장미라는 작품으로 작가는 장미셀 오토니엘입니다. 이 양반이 무명 시절 루브르의 전시실 지킴이였어요.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에요. 루브르의 작품에 나타난 꽃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거에요. 2023년 서울 덕수궁에서 전시회를 한 바 있죠.
장미셀 오토니엘(Jean-Michel Othoniel 1964-), 야행성 인간들의 정자, 2000, 루브르 리볼리역 입구
바로 이때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내려고 가방을 열었다. 있어야 하는 자리가 없질 않나. 순간 손이 민망해졌다. 흐흐 분명히 챙겨왔는데, 혹 잊고 집에 두고 왔나. 루브르를 나가면 루브르 지하철 역 입구가 이 작가의 설치 작품인데 자료 화면을 보여주려했는데 태블릿이 없네요. 그 참 이상하네. 어제 저녁 분명 백퍼센트 충전을 하고 가장에 넣어두었는데...
어쨌거나 그쪽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팔레 루아얄 정원이 나옵니다. 팔레 루아얄 정원에 함 가보시라고. 요즘은 구글맵에 한글로 쳐도 나오잖아요. 화면으로로 보여줄 수 없어서 팔레 루아얄 정원의 다니엘 뷔렌 기둥을 소개하지 않았다.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몇 번이고 아이패드를 넣는 칸에 손을 넣어 있나 확인했다.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메소포타미아관부터 하는 수 없이 손바닥만한 아이폰 미니13 휴대전화 화면을 통해 자료 화면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투어 내내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잊고 집에 두고 온 거겠지.
카르푸르에 들러 고양이 모래며 사료 습식과 몇 가지 음식 재료를 사들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짐 부려놓기가 무섭게 책상으로 잽싸게 움직였다. 없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러면 잃어버린 건데.
순간 머릿속이 휑해지며 정신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가방 안이며 책상 주변까지 뒤졌다. 결과는 마찬가지. 아이패드는 흔적없이 사라졌다.
집밖을 나서자 나도 몰래 걸음이 빨라졌다. 미용실 약속이 늦을까봐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서둘러서 분실물 센터로 가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루브르가 가까워지면서 가슴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혹 거기 있을지도 몰라. 분명 1호선에서 소매치기 당했을리가 없어. 속으로 사무실에 들어 말할 문구를 되뇌여보았다.
어제 제 태블릿을 잃어버렸어요.
어제부터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드뎌 오셨군요.
이게 무슨 소리, 그럼 여기 있다는 말씀.
한 줄기 서광이 비쳤다.
애플 제품 맞죠?
네.
어제 오전 루브르에서 일하던 중 가방에서 제 태블릿이 없는 걸 발견했어요. 너무 피곤해서 어디서 사라졌는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1호선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는지 아니면 루브르에서 잃어버렸는지... 1200유로 주고 산 거였어요.
담당 직원이 물건을 찾아오는 데는 한참 걸렸다. 혹시 내 거가 아니면. 잔뜩 긴장하고 말없이 기다렸다. 직원이 물건을 갖고 사무실로 되돌아오는 데까지 몇 분이 지났다.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직원이 비닐 포장을 열어 아이패드를 내 앞에 놓았다. 하얀 가죽 커버에 뒤덮인 채 넙죽하니 주인을 맞았다.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한 순간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 날아갈 것 같았다.
제 거 맞아요.
한번 켜보세요.
비밀번호를 눌러 화면을 켰다.
아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손을 모으고 몇 번씩 머리를 조아리고 문을 열고 나왔다.
네 명의 직원도 환한 웃음으로 화답해주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해서 내 아이패드가 가방에서 사라졌는지 아직도 미스테리다. 루브르에서 일어난 것은 확실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