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숙함이 낯섬으로 변했을 때
Orhan Pamuk, Cette chose étrange en moi, coll. folio, Gallimard, 2017.
연대기적 풍속소설
[내 마음속 이상한 그 무엇]의 부제는 길고도 상세하다. « 보자 장수 메블룻 카라타쉬의 삶, 모험과 꿈 그리고 친구들 이야기와 여러 인물들의 눈으로 본 1969-2012년에 걸치는 이스탄불 풍경 ». 마치 17-18세기 프랑스 소설 제목처럼 묘사적이다. 그리고 작가는 소설 맨 끝에 2008-2014에 걸쳐 썼다고 적어두었다. [제브뎃 씨와 자손들]에 버금가는 긴 분량의 장편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의 앞 머리에 복잡한 등장인물들의 관계도를 제시해 두었다. 메블룻하고 관련되는 부분이 시작되는 곳에는 멜대를 맨 보자 장수 삽화가 들어간다.
이 소설은 총 7부로 된 대하소설로서 8분의 7을 차지하는 3, 4, 5부는 다시 여러 개의 장으로 나뉜다. 각각의 장에는 제목이 달린다. 또 에피그래프가 각 부의 본문 앞에 들어간다. 무엇보다 각 부는 정확한 연대 구분이 있다.
소설 맨 앞에 주인공의 외양과 성격을 묘사해두고 있다. "메블룻은 다부진 몸집에 훨칠하게 잘생긴 남자였다. 여자들한테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앳된 얼굴에 갈색 머리, 주의깊고 영리한 눈이었다." (p. 17) 그는 마흔 넘어서도 동안을 유지하여 여자들한테 호감을 준다. 순진하고 고지식하지만 근본적으로 선량한 낙관주의자다. 사미하한테 연애편지를 쓰고 납치했다고 믿었다가 납치한 소녀가 언니임을 알고 배신감을 느꼈다가 바로 현실을 받아들인다.
소설이 시작되는 1부는 스물다섯 메블룻이 열일곱 라이하를 납치하는 정확한 날짜다. « 1982년 6월 17일 금요일 ». 큰 제목은 « 메블룻과 라이하 ». 작은 제목으로 « 소녀 납치는 힘든 작전이다 ». 메블룻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라이하 납치 사건을 소설 맨 앞에 배치한다.
2부는 보자 장수 25년째인 메블룻이 2인조 강도한테 돈과 손목시계를 강탈당하는 사건을 다룬다. « 1994년 3월 30일 수요일 ». « 25년간 매 겨울 저녁의 메블룻 », 부제는 « 보자 장수를 건드리지 마세요 »다.
3부는 과거로 되돌아가서 « 1968년 9월 - 1982년 6월 »로 콘야 주 베이쉐이르 군 외곽 시골 마을에서 이스탄불에 도착한 다음 이스탄불에서 보내는 중고등학교 시절과 군 복무 기간을 다룬다. 메블룻은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행사 서구풍 여직원한테 반한다. 군에서 제대하여 라이하를 납치하는 날로 연결된다.
4부도 « 1982년 6월 - 1994년 3월 »로 긴 기간을 다룬다. 메블룻이 라이하와 결혼하고 메블룻은 낮에 필라프와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고 밤에는 보자를 팔러 다닌다. 메블룻이 가장 행복한 시기로 두 딸이 태어나 오손도손 타를라바숴 구역에서 가정생활을 꾸려나간다. 한편 사미하가 도주하여 사라졌다가 가지 구역에서 페르핫과 살림차린 것이 밝혀진다. 어느 날 메블룻은 수레를 잃어버려 더 이상 아이스크림과 필라프를 팔지 못한다. 이 무렵 슐레이만은 메블룻이 보낸 연애편지 상대자가 사미하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메블룻은 빈봄 식당 지배인으로 정직하게 일하지만 다른 직원들의 뒷거래에 휘말려 해고당한다.
5부는 « 1994년 3월 - 2002년 9월 »에 해당한다. 페르핫과 보자 식당을 공동 운영하지만 새세대의 입맛에 맞지 않아 실패한다. 페르핫은 전기세 징수원으로 일하면서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린다. 그러던 중 페르핫은 미납 단속 중 미모의 여인한테 반한다. 보자 식당 시절부터 라이하가 남편의 편지 상대자가 사미하였다는데 의심을 품고 질투심을 느낀다. 메블룻은 식당 문을 닫은 다음 주차 단속원으로 취직하나 이해관계로 얽힌 암투극의 희생자가 된다. 라이하가 셋째를 임신했으나 스스로 중절을 시도하다 죽는다. 페르핫은 마피아가 연루된 나이트클럽 전기세 미납건에 휘말려서 암살당한다. 두 딸이 결혼하고 메블룻은 혼자가 된다. 그는 미망인 처제 사미하와 재혼한다.
6부는 « 2009년 4월 15일 »이다. 메블룻과 사미하는 자신이 살던 판자촌으로 되돌아온다. 판자촌이 12층 아파트로 변하여 큰아버지 부부, 사촌 둘과 같은 아파트에 입주한다.
7부는 « 2012년 10월 25일 목요일 »로 역시 정확한 날짜다. 제목이 « 도시의 형상 »이고 부제로 « 나는 걸어 다녀야지 깊이 생각한다 ». 53세의 메블룻은 여전히 보자 행상을 한다.
연애소설과 결혼 풍습
파묵 소설의 두 축인 연애소설과 추리소설의 요소가 적절히 배합되어 끊임없이 사건과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뒤엉킨다. 이런 줄거리에 어지러운 사회상이 배경으로 깔린다. 서사의 전개는 다양한 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샬의 기법처럼 같은 사건을 두고 다양한 인물들의 폴리포니를 들을 수 있다. 이리하여 하나의 사건은 명백하게 끝나지 않고 늘 미심쩍은 구석을 남기면서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대표적인 예가 메블룻의 연애편지 상대자를 두고 서로 다른 인물들이 다양한 의견을 보인다.
주인공 메블룻은 벽촌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 년을 빈둥거리다가 열두 살에 중학교 진학하러 요구르트 행상 아버지를 따라 이스탄불로 온다. 대학까지 진학하려던 메블룻은 유급에 유급을 거듭한 끝에 스물둘이 되어서도 고등학교 졸업장도 거머쥐지 못한 채 학업을 중단하고 군입대를 한다. 그는 중학 시절부터 방과 후면 정직한 아버지를 본받아서 행상꾼의 길로 나선다. 어깨에 멜대를 걸치고 양쪽에 들통을 달아 낮에는 요구르트 장수로 밤이면 전통 음료인 보자(1)를 팔러 이 거리 저 거리를 돌아다닌다. 자신의 아버지한테 숨긴 채(2) 고교 동창 페르핫과 함께 정직하지 않은 뽑기 장수로 나서기도 하고 아이스크림과 필라프(3)도 같이 판다.
메블룻은 사촌형 결혼식 때 딱 한번 눈길이 마주쳐 아름다운 검은 눈에 반한 라이하한테 3년 동안 수백 통의 연애편지를 일방적으로 보낸다. 특히 군 복무 기간 동안 여러 통의 편지를 쓴다. 제대 얼마 전 메블룻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한다. 편지 전달꾼은 동갑내기 사촌 슐레이만이다. 자신의 형수 바이하가 바로 라이하의 언니다. 편지는 바이하를 통해 라이하한테 전달된다. 메블룻은 최상급 연애편지를 작성하려고 친구 페르핫의 도움을 받고 연애편지 교본도 참조한다. 1982년 6월 17일 밤 슐레이만의 도움을 받아 메블룻은 합의하에 17세 라이하를 납치한다. 그런데 악쉐이르 기차역 대합실에서 납치한 소녀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본 결과 자신이 반했던 라이하가 아니다. 자신이 생각한 소녀의 언니다. 라이하는 납치해서 지금까지 보여준 미적지근한 메블룻의 반응에 실망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진짜 열렬히 사랑한다고 연애 편지를 쓴 사람이 맞냐고 다그친다. 메블룻은 분명 맞다고 대답한다. 속았다고 억울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메블룻은 라이하가 보내는 숨김없이 솔직한 미소를 보고서 차츰 누그러진다. 이리하여 이스탄불 역에 도착할 즈음 둘은 오해가 풀린 연인이 된다. 군에서 갓 나온 25세의 메블룻은 정식 구혼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고 라이하는 법적 혼인 연령 18세가 되기 전이다. 메블룻은 비공식적으로 이슬람 사제의 주관으로 종교 혼례 증명서를 입수한 다음 장인한테 정식 구혼 요청하여 시민 결혼식을 치른다.
메블룻 아버지 형제는 자매와 혼인을 맺고 자식 세대는 사촌끼리 자매와 결혼한 관계다. 세 자매 가운데 인물이 가장 빼어난 막내 사미하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어느 사회에서나 결혼을 빙지한 사랑의 도주는 늘 일어난다. 사미하와 그의 아버지 압두르아흐만은 시골에서 이스탄불에 오면 늘 바이하의 집(메블룻 큰아버지 집으로 사촌 코르쿳과 슐레이만이 함께 산다)에 머문다. 슐레이만은 사미하에게 사랑에 빠져 결혼을 꿈꾸던 참이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사미하는 메블룻의 절친 페르핫과 도주한다. 한편 슐레이만은 종적을 감춘 사미하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슐레이만에게 신붓감을 찾아주려고 사미하의 언니 바이하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슐레이만은 술과 담배를 즐겨하는 밤무대 가수인 연상의 멜라핫과 연애 결혼한다. 슐레이만의 큰 조카(코르쿳과 바이하의 아들)도 육촌 여동생 메블룻의 큰딸한테 사랑에 빠진다. 파트마가 혼인 연령에 이르지도 않은 상태고 메블룻은 근친 간 결합을 꺼린다. 당사자인 파트마(4)는 대학의 관광학과에 진학하여 동급생과 사귀어 연애결혼을 한다. 메블룻 둘째 딸 페브지에도 막내 이모 혈통을 이어받아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 도주하여 택시 회사 사장의 아들과 결혼한다. 1980년대 이후에도 전통적인 합의 도주를 통한 결혼 풍습이 남아 있는 터키 사회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 소설에 나타난 가족 관계는 특이하다. 전통적으로 터기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자식 간의 정서적 유대가 더 강한 사회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는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가 두드러지고 어머니의 역할은 뒤로 밀려난다. 세 딸(바히아, 라이하, 사미하)의 아버지 목비뚤이 압두라흐만(5)은 상처를 한 뒤 재혼하지 않고 세 딸을 돌보는 보호자로 딸들을 결혼시킨 다음에도 친밀한 관계를 끝까지 유지한다. 대표적인 예는 메블룻과 아버지 무스타파의 경우다. 형 하산은 이스탄불에 정착하고 고향에서 부인을 데려 오지만 무스타파는 두 딸과 부인을 시골에 그대로 둔다. 메블룻에게 아버지는 단순한 보호자나 권위적 존재를 넘어 보자 장수라는 생업과 도시에서 살아가는 방도를 전해주는 정신적 지주다. 형 하산이 꾀바르게 변신하여 요구르트 행상에서 식료품상으로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고 이런 기질을 물려받은 하산의 두 아들들도 건축업에 뛰어들어 세속적인 성공을 거둔다. 하산의 아내는 바로 메블룻 어머니의 언니로 이모로서 메블룻을 곰살맞게 대한다. 메블룻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정은 애틋하지만 시골에 남아 있는 어머니나 누나들과는 설면하다. 메블룻 자신도 두 딸과는 관계가 끈끈하다. 부인 라이하가 죽은 뒤에는 두 딸한테 정서적으로 의지한다. 메블룻의 두 딸 역시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와 더 두터운 관계다. 메블룻은 라이하와 닮은 속 깊은 큰딸한테 더 기대하고 의지 상대로 생각한다.
보자 식당을 함께 운영하면서 애써 피해왔던 만남을 피할 수 없게 되자 메블룻과 사미하는 한 공간에서 일하게 되고 때로는 둘만 남기도 한다. 이때부터 라이하는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메블룻이 보낸 연애편지 상대자는 자신이 아니고 동생이었을지도 몰라. 남편에 대한 의심은 질투심으로 바뀐다. 그와 함께 점점 힘들어지는 경제 상황은 그녀를 더욱 벼랑으로 몰고 간다. 자신의 자수 부업이 아니면 남편의 수입으로는 도저히 생계유지가 힘들다. 재료를 사다가 집에서 필라프와 보자를 손수 장만하는 사람은 라이하다. 생활은 점점 더 쪼들리고 질투심은 달아오르는 사이 셋째 아이를 임신한다. 남편 동의가 필요한 중절 수술의 때를 놓치자 그녀는 스스로 중절을 시도하다 서른에 죽는다.
홀아비가 된 뒤 메블룻은 두 딸마저 한 해에 결혼해서 떠나자 메울 길 없는 외로움에 빠진다. 메블룻은 라이하에 대한 애정 때문에 섣불리 재혼 결심을 하지 못한다. 메블룻 둘째 딸 결혼식 때 사미하는 메블룻한테 끌리는 눈길을 보내 넌지시 의향을 밝힌다. 그렇지만 주변에 아무도 대놓고 과부 처제와 재혼하라고 권유하지 않는다. 사촌형이 지나가는 말로 얼핏 거들고 나중 가서 슐레이만이 단도직입적으로 메블룻한테 재혼을 권한다. 이때 슐레이만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한다. 자신이 사미하를 점찍었다. 메블룻을 라이하랑 결혼하게 만들고 자신은 사미하를 차지할 속셈이었다. 슐레이만은 20년 지난 일이니 넘어가자며 자신은 현재 결혼해서 행복하다. 그러니 메블룻도 사미하와 재혼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슐레이만의 지적대로 메블룻과 사미하가 서로 재혼 상대로 안성맞춤이다. 모든 쌍들이 결혼하기만 하면 앞다투어 출산하는데 사미하만 불임이다. 자식이 없는 사미하는 두 질녀들을 제 자식처럼 살갑게 대한다. 메블룻은 재혼을 통해 외로움에서 벗어나겠거니 여기고 마침내 재혼을 결심한다. « 단호하며 강단 있는 » 사미하는 « 정직하고 신실하며 온화하며 원만한 »(6) 메블룻으로부터 진짜 편지 상대자가 자신임을 확인하고 재혼에 동의한다. 메블룻의 큰딸 파트마는 아버지가 이모와의 재혼에 반대하여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지만 나중에 화해한다. 한편 둘째 딸 페브지에는 아버지의 재혼에 적극 찬성한다.
결국 맨 처음 사랑의 눈길을 주고받은 대상은 사미하였지만 연애편지는 라이하 앞으로 보내지면서 라이하와 결혼했다! 슐레이만이 반드시 둘이 재혼해야 한다고 부추기자 메블룻은 연애편지는 라이하 앞으로 썼다고 단호하게 반박한다. 이 사실을 두고 작가는 분명하게 정보 제공을 하지 않고 늘 불확정적으로 내버려 둔다.
사미하한테 말로는 그녀가 연애편지 상대자라고 밝혔지만 마음으로 진정 사랑한 여인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주고 위로한 라이하다. 개인적(마음)으로도 그렇고 공식적(말)으로도 메블룻이 «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사람은 라이하다. » 로 소설은 끝난다.
세상이 바뀌어도 늘 보자 장수
메블룻의 친한 친구 페르핫은 쿠르드족 출신으로 종교적으로는 신비주의파 알레비(7)에다 좌파 진보 혁명주의자이다. 한편 메블룻 두 사촌은 주류 수니파 이슬람으로 현실지향적인 민족주의자이다. 메블룻은 이 두 진영 사이에 놓이는 경계인으로 정신적으로 힘들 때는 모스크를 찾아 기도하기도 하고 신비적인 수피즘(8) 지도자며 그가 « 예하 »라고 부르는 서예 대가한테 기댄다. 그렇지만 메블룻은 유연하고 현실 적응력이 뛰어난 페르핫한테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는 해도 정서적으로 완전히 공감하지 않는다. 페르핫의 도움으로 빔봄 식당 지배인이 되고 동서(페르핫과 메블룻은 동서 사이다) 보자 식당이 문을 닫은 뒤에는 다시 그의 주선으로 주차장 관리인으로 일한다. 보수 전통주의자인 사촌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여러모로 도움을 받는다. 마지막에 메블룻은 사촌형의 도움으로 향우회 사무실 직원으로 일한다. 절대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착한 성격의 메블룻은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빠른 사회 변화에 아랑곳없이 그저 우직하게 보자 행상을 한다. 아이스크림과 필라프 행상꾼의 필수품 삼륜 수레를 시청 공무원한테 압류당해 파기된다. 어느 밤중에 강도를 당해 번돈이며 결혼 선물로 받은 중국산 스위스 손목시계도 빼앗긴다. 그럼에도 그는 절망하지 않고 늘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메블룻은 본업인 야간 보자 행상으로는 생활을 제대로 꾸리지 못한다. 겸업을 해야 생활비를 벌 수 있다. 빔봄 식당의 지배인으로 성실하게 일하지만 다른 직원들의 암거래에 휘말려 들어가 해고당한다. 메블룻은 페르핫과 함께 운영한 보자 분식집도 변화하는 소비자 취향에 발맞추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주차장 관리원으로 일하다가도 알력 관계의 희생자가 된다. 적응력 뛰어난 페르핫이나 사업 수완이 좋은 사촌들 도움 없이는 생계유지를 할 수 없지만 메블룻은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성실하게 살아간다.
다시 생계가 막막해진 메블룻은 페르핫의 주선으로 전기세 징수원으로 발을 내딛는다. 식당이나 나이트클럽 운영이 그렇듯 전기세를 제대로 내지 않고 불법 사용하는 분야는 경찰, 정치권, 마피아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터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첨예하게 잘 보여주는 전기 불법 사용에서 나이트클럽의 전기 도용을 고발하여 득을 보려다 페르핫은 암살당한다. 후견인이 없어진 메블룻은 자연 전기 회사에서 퇴출당한다.
1998년 이제 메블룻은 낮동안 사촌형의 도움으로 향우회 사무실 관리인으로 일한다. 그래도 보자 행상은 계속 이어간다. 딸들이 결혼하여 부담이 덜어지고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에서 나오는 월세까지 합쳐 마침내 그는 곤궁한 생활에서 벗어난다. 사미하도 페르핫으로부터 아파트 두 개를 물려받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다.
주변 인물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새 시대에 잘 적응해도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그는 늘 고리타분한 보자 장수로 머문다. 심지어 « 더욱 억세고 공격적인 » 새로운 세대의 행상꾼한테 어쩔 수 없이 밀려난다. « 돈벌이에만 눈먼 새세대의 상스러운 행상들은 왁자지껄 외치면서 기꺼이 뜯어내고 시도 때도 없이 가격 파괴도 일삼았다. 그리하여 구세대 행상들은 이 도시의 혼돈 속으로 사라져 가는 존재였다. » (p.667) 메블룻은 대량 생산된 플라스틱 용기의 보자를 냉장 보관하여 슈퍼마켓이나 간이식당에서 판매하는 21세기에도 집에서 손수 만든 보자 행상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보자 찾는 사람이 나날이 줄어들어 수입이 변변찮아도 대단한 낙관주의자 메블룻은 보자 행상을 죽을 때까지 하겠노라고 밝힌다. 보자 행상은 단순히 음료만 파는 게 아니다. 옛 추억이 서려 있는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전통 음료를 잊지 않고 찾는 사람들과 끈끈한 정을 맺는다. « 보-자- »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은 소비자는 그냥 음료만 구입하는 게 아니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자신들의 혼을 발견한다. 모든 게 다 변했어도 보자를 파는 행상과 음료를 구입하는 고객 사이에는 변하지 묘한 그 무엇이 오고 간다.
삶의 궤적이 새겨진 원형 공간
7부 머리에 두 개의 에피그래프가 들어간다. 작품의 정곡을 찌르는 명구다. 너무나 반가운 두 작가의 구절을 인용해 보자.
« 오호라! 도시 모습이
인간 마음보다 더 빨리 변한다네! »
샤를 보들레르, [백조]
« 난 걸어 다녀야지 깊이 생각할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머진다. 머리는 발과 함께라야 움직인다. »
장자크 루소, [고백록]
무대는 파묵 소설의 원형 공간인 이스탄불이다. 옛 이름이 콘스탄티노플로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다. 1453년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뒤 오스만 터키의 수도였다. 네르발은 [동방여행] 4부 대부분을 차지하는 « 라마잔의 밤 »에서 19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플의 밤 풍속을 카페의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 솔로몬 왕과 사바 여왕 »을 통해 보도적인 여행기가 아니고 상상적인 여행기를 쓴다.
어쩌면 파묵 소설에서 이 도시가 주인공 인물보다 더 중요한 주인공이다. [이스탄불]이나 [다른 색깔들]의 산문과 [제브뎃 씨와 자손들], 특히 [순수 박물관]에서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내 마음속 이상한 그 무엇]의 부제가 « 이스탄불 풍경 »이다. 이스탄불은 동서양이 만나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서로 다른 시간이 중첩되는 경계의 도시다. 20세기 들어와 이스탄불은 화려한 과거를 품은 채 빠르게 서구화되어간다. [제브뎃 씨와 자손들]에서 20세기 들어와 빠르게 변모하는 이스탄불을 잘 그려낸다. 대표적으로 니탄타스의 전통적인 귀족 목조가옥 코낙이 허물어지고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바뀐다.
메블룻과 사미하가 재혼해서 정착한 곳은 메블룻이 살던 아파트도 사미하가 살던 데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와 11년간 함께 살았던 판자촌 단칸집이다.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의 추억이며 아버지의 숨결과 냄새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원형 공간이다. 메블룻이 사미하와 재혼하여 살림을 차리려고 다시 방문했을 때 부자가 쓰던 난로며 숙제할 때 이용하던 절름발이 탁자, 맨땅 바닥이며 구멍 화장실, 심지어 수프나 커피를 준비하던 냄비도 33년 전 그대로다. 단지 전기 라디에이터만 새로 들어와 있다. 숙제하다 바깥으로 내다보던 창문도 침대 받침대도 그대로다. 변두리 지역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퀼테페의 게제콘두(9)는 아파트 촌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다시 찾은 퀼테페 동네는 그 사이 완전 딴 동네로 변했다. 비좁은 골목길은 대로로 바뀌고 비포장 흙탕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된다. 날림으로 지은 엉성한 게제콘두는 4-5층짜리 콘크리트 건물로 변신하여 변호사, 건축사, 회계사 사무실이 들어서고 지붕 위에서는 파라볼 안테나와 광고판이 설치되어 있다. 식료품상에서 건축 사업가로 성공한 하지 하미트 부랄이 뒤테페(10)에 세운 모스크와 포플러 나무만이 그 자리를 지킨다. 메블룻은 수많은 추억이 새겨진 게제콘두가 포클레인으로 한 순간에 가루로 변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눈물을 적신다.
메블룻의 게제콘두가 헐리고 그 자리에 부랄 가문에서 시공한 12층짜리 현대식 아파트가 들어선다. 메블룻과 큰아버지 하산, 사촌 둘 모두가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된다. 수완을 발휘한 사촌들과 큰아버지는 전망 좋고 투자 가치가 높은 고층을 분양받지만 메블룻은 2층 북향 아파트에 입주한다. 큰아버지 하산이 서류 위조하여 더 이득을 보자고 제안하지만 메블룻이 거절한 결과다. 게다가 부친의 상속을 자신의 어머니나 누나들과 공평하게 나눈다. 메블룻은 친척들이 한 건물에 모여사는 어색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미하가 재혼하기 전 살던 시내 쪽 아파트로 이사 가기로 한다. 게제콘두가 사라진 공간은 이제 더 이상 옛 기억을 보듬을 수 없다.
친숙함이 낯섬으로 바뀌었을 때
메블룻은 종종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의식이 흐릿해진다. 밥벌이에 필수 도구인 삼륜 수레를 잃어버렸을 때 « 그렇지만 지금 메블룻은 자신이 수레를 피하는 것처럼 수레로부터 멀어져 갔다. 꿈에서처럼 비현실적이고 보이지 않는 그런 감각이었다. 마치 수레를 잊어버리고 싶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책감이 들었다. » (p. 473)
경계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때때로 주인공 메블룻은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이 골목이 현실의 공간인가 비현실적 공간인가? « 그날 저녁 아무도 보자를 사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목조 주택이나 난로 연기로 어둑신해진 거리며 허물어진 벽 등이 이 구석을 추억의 도시로 되돌려 놓았다. 메블룻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정확히 어디에 있는 지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 (p. 485)
부인과 사별하고 두 딸들도 혼인하여 떠나자 마흔다섯 메블룻은 헤어날 수 없는 외로움에 빠진다. 문득 이 도시의 길이 한층 길게 늘어져 «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우물 »처럼 느껴진다. 홀로 늦은 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먼 동네까지 진출했다가 까닭 모를 공포심에 사로잡힌다. 갓 건축한 콘크리트 벽들과 수도 없이 부착되어 쉴 새 없이 바뀌는 벽보며 안쪽으로 살짝 휘어져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이 모든 게 공포심을 증폭시킨다. « 커튼 하나 움직이지 않고 창문 하나도 열리지 않는 고요한 거리 »를 지날 때면 한 번도 지나간 적이 없는 길이지만 아득한 옛날에 지나갔다는 어슴푸레한 무의식적 추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갑자기 출입금지된 장소에서 개 짖는 소리(11)를 듣고 공포에 떨던 기억도 되살아난다. 이 순간 갑자기 혼자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낯설게 변해버린 이 도시에서 자신을 부여잡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끈은 날이 갈수록 찾는 찾는 사람이 줄어드는 보자 행상이다. 변화하는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고 적당하게 부정부패에 가담하지 못하는 메블룻은 점점 주변인으로 외톨이가 된다. 특히 자신이 살아가는 변해 버린 도시에서도 멀어져 간다. 늘 낯익고 친숙한 것이 낯설어졌을 때 느끼는 묘한 감정이다. 고립감을 달래려고 메블룻은 정오와 저녁에 이 동네 저 동네 모스크를 자주 찾는다(12). 메블룻이 정 붙일 수 있는 공간은 터번처럼 옥개석이 덮이고 아랍어 비문이 써진 비석들이 늘어선 옛 공동묘지나 아랍어 전통 서예를 가르치는 수피 지도자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젊은 세대는 잘 찾지 않는 보자를 아직도 찾는 옛 추억을 간직한 전통주의자에게 정을 쏟는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음료 보자 행상을 통해 오십 대 중반에 이른 메블룻은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그렇지만 그는 문득 현실과 꿈의 경계에 놓여 혼란에 빠진다. 자신이 사는 도시가 진짜인가 꿈에서 본 도시인가?
메블룻은 자신을 사로잡던 빛과 그림자 속에서 어떤 밤의 정취를 느낀다. 이리하여 그는 사십 년을 빠짐없이 밤이면 거리를 누비며 보자를 팔러 다닌다.
« 그는 밤에 이 도시의 거리를 돌아다닐 때면 마치 자기 머릿속을 거닌다는 느낌이 들었다. 벽들이나 벽보, 그림자 그리고 어둠 속에서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기묘하고 신비로운 것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 » (p. 800)
이슥한 겨울밤 현대화된 이스탄불의 골목길에서 메블룻은 보-자-(boo-zaa)하고 외친다. 이 소리는 빠르게 변해가는 도시 속에서 더욱 낯설게 울려 퍼진다. « 이끼 뒤덮인 낡은 벽들과 멋진 비문이 새겨진 옛날 분수들, 기울어져 서로 기대고 떠받치며 썩어가는 목조 가옥들이 연기와 폐허, 먼지 속으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 그 자리에 더 낡고, 더 음산하며, 더 혼란스러운 네온사인으로 밝혀진 상점들과 콘크리트 건물들, 새로운 거리들이 세워진 것처럼 보였다. » (p. 705) 이리하여 이 도시는 하나의 넓은 거처 같은 느낌이나 친밀함이 사라지고 신이 없는 물질만 판치는 장소로 변한다. 그럼에도 메블룻은 세태 변화에 편승하지 않고 꿋꿋이 자기식대로 살아간다. 그가 내지르는 이 말속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옛 삶의 방식과 지난 시간의 흔적도 간직한다. 혼돈의 도시 속에서 과거를 되살리는 마술 피리처럼 들린다.
이 소설은 1969-2012년에 해당하는 기간에 걸쳐 메블룻이라는 보자 장수의 생애를 통해 터키 사회의 변천 과정을 만화경적으로 그려낸다. [제브뎃 씨와 자손들]이 20세기 초에서 중반에 이르는 시대 배경으로 이스탄불 엘리트 청년들의 눈으로 보는 사회 변천사라면, [내 마음속 이상한 그 무엇]은 이스탄불 최하층 행상꾼의 삶을 통해본 1969-2012년에 걸치는 터키 사회 변천사이다. 그렇지만 주인공 메블룻의 감정을 통해 느끼는 묘한 변화이다. 도시와 사람이 완전히 변해버린 것 같지만 어딘가에 옛 기억은 남아 있다. 때때로 그가 40년을 살아온 친숙한 도시에서 이상한 낯섦을 느끼면서 혼란에 빠진다.
1. 보자(boza) : 터키를 비롯한 발칸 반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발효 음료로 터키에서는 겨울철 대표 간식처럼 즐겨 마신다. 기장이나 옥수수, 밀 등을 삶아 으깬 뒤 발효시켜 만든다. 달콤하면서 시큼한 독특한 풍미가 있다. 걸쭉하고 부드러운 미음 같은 음료로 약 1% 알코올이 함유되어 있다. 계피 가루나 볶은 병아리콩을 얹어 떠먹는다.
2. 여름철이면 아버지 무스타파는 고향에 내려간다. 이 기간은 메블룻 혼자 이스탄불에 남는다.
3. 필라프(pilaf)는 쌀 또는 곡물을 볶은 다움 기름과 육수로 지은 고슬고슬하고 풍미 진한 밥 요리를 말한다.
4. 지방 출신으로 이스탄불에 정착한 2세 가운데 유일하게 대학까지 진학하는 인물이다. 베이쉐이르 군 향우회에서는 자녀가 대학 진학하면 장학금을 준다.
5. 무스타파나 하산과 같은 지역 출신인 압두라흐만은 이스탄불에 올라와 야쿠르트 행상을 하다가 약질이어서 일찍 은퇴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무거운 야쿠르트 들통을 메고 행상을 하다 목이 비뚤어진다. 특히 압두라흐만은 전통 포도주 증류주인 라키(raki)를 즐겨마시는 한량이다.
6. 슐레이만이 메블룻이 사미하와 재혼하라고 권하면서 사미하와 메블룻의 됨됨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p. 710-711)
7. 알레비(alevi)는 신비주의 성격이 강해 교리보다 내면의 깨달음과 영적 체험을 중시하여 모스크가 아니라 제메비라는 공간에서 기도하고 남녀가 같이 의례에 참여하며 음악과 춤을 통한 예배가 특징이다.
8. 수피즘(soufisme)은 특히 빙글빙글 도는 춤을 통해 영적 체험으로 신을 느끼고 하나가 되는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
9. 게제콘두(gecekondu)는 도시 변두리의 빈 땅을 점유하고 스스로 밤에 몰래 집을 지어 아침이면 이미 사람이 사는 집처럼 지은 빈민촌의 집을 말한다.
10. 퀼테페와 마주하고 메블룻의 큰아버지 하산과 사촌들이 사는 동네. 터키어에서 테페는 밋밋한 작은 언덕을 말한다. 그리고 지명에 붙는 되레(-döre 또는 -dere)는 시내, 개울을 뜻한다. 쾨이(-köy)는 마을, 동네라는 뜻이고 쉐이르(-sehir)는 도시, 시라는 뜻이다. 라이하의 고향 마을 이름이 귀뮈쉬데레(Gümüsdere)다. 메블룻의 고향 마을 젠네트프나르(Cennetpinar) 옆 마을이다. 그러니까 메블룻과 라이하는 콘냐 주 베이세이르 군 출신이다.
11. 메블룻은 어릴 때부터 느닷없이 습격하는 개짓는 소리에 공포심을 느낀다. 공포심에 대한 치료 방법을 찾으려고 이슬람 사제를 찾아가 조언을 듣는다. 이 두려움은 단순히 물리적인 게 아니라 심리적인 영향이 크다고 진단한다.
12. 메블룻은 향우회 사무실에 나오는 사람들로부터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오인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