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이번 주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송년회 전주였다.
몇 번의 모임에 나가다 보니 공통적으로 받는 질문이 있었다.
“왜 이렇게 바쁘세요?”
“저보다 더 바쁘게 사시는 것 같아요.”
“육아에 일에 공부까지, 힘들지 않으세요?”
나는 이렇게 답했다.
공부하는 시간이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고, 학교에 가는 길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달리는 그 시간이 참 행복하다고.
물론 늘 그렇지는 않다.
힘이 들고 버거워서 눈물을 흘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바쁘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나는 지난 12년 동안 경력단절 속에서 사회와 다시 연결되기를 갈망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12년 동안의 육아는 내 삶에서 너무도 큰 공백처럼 느껴졌다.
여러 번 사회로 복귀하려고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큰아이를 낳은 후 자가면역질환을 앓게 되었고, 4년 동안 1년에 서너 번씩 수술과 입원을 반복하며 병원에서 생활했다.
양가 부모님은 연로하시고 먼 곳에 계셨고, 나는 오롯이 독박육아로 아이들을 키웠다.
남편은 자영업을 하고 있어 주말이면 늘 일을 나갔다.
육아에 대한 정보도, 도움도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다 보니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면역질환으로 4년을 병원과 집을 오갔고, 아이 역시 잔병치레가 잦아 자주 함께 입원했다.
그렇게 병실에서 아이 손을 잡고 밤을 보내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다행히 4년 만에 병은 완치되었고, 운동을 하며 조금씩 건강을 되찾았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공장에서 하루 네 시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사장님의 파산으로 세 달 치 월급을 받지 못한 채 무보수로 일하다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명절에 강원도 시댁에 가면 늘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언제까지 애만 볼 거냐.”
같은 시기에 육아와 일을 병행하던 형님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마음은 더 조급해졌고,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하고 싶었다.
열심히 살고 싶었다.
그러나 조건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계속해서 체감하며 살았다.
그래도 나는 묵묵히 육아에 전념하며 큰아이에게 집중했다.
큰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결혼 전에 취득했던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떠올랐다.
하지만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결국 봉사부터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지역아동센터에 지원했고, 하루 두 시간씩 봉사를 시작했다.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센터장님이 파트타임 생활지도사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보셨다.
그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지하철로 한 시간 거리의 센터를 세 달 동안 다녔다.
하지만 퇴근해 집에 오면 저녁 일곱 시.
아이는 학원에 혼자 남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아이의 정서에 문제가 생기고 있음을 느꼈다. 결국 그 일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아이의 학교 입학을 준비하며 도서관과 체험장을 다니며 아이 곁에 머물렀다.
그 시간 동안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누군가 아이의 양육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는 사회로 복귀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이가 고열로 어린이집을 가지 못하는 날이면, 기관에 사정을 설명하며 눈치를 봐야 했다.
아이 여덟 살,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아이는 매일 집에 있었고, 그 무렵 둘째 아이가 찾아왔다.
입덧과 고위험 임신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며 어렵게 둘째 아이를 낳았다.
경력단절은 다시 이어졌다.
둘째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 다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외벌이로 두 아이를 키우는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고, 큰아이의 사교육비도 부담이 컸다.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오전 근무만 가능한 일자리를 찾아 수없이 면접을 봤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늘 같았다.
“경력이 없네요.”
“아이가 어려서 자주 못 나오실 것 같아요.”
자존감은 바닥까지 떨어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문득 양아버지께 조언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7년 전부터 인연을 이어온 분으로, 지금도 아이들의 외할아버지 역할을 해주시는 고마운 분이다.
고민을 털어놓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참에 공부해서 전문성을 쌓아보는 건 어떻겠니.”
그 말에 용기가 생겼다.
둘째 아이가 3살이 되던 해에 사회복지 석사과정에 도전했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보험을 해지하고, 아이들 돌반지와 결혼 예물까지 정리했다.
그다음 학기에는 장학재단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장학금으로 학비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2년의 석사과정과 함께, 보육교사 공부도 병행했다.
평일과 주말을 오가며 공부했고, 일요일마다 서울의 교육원을 다녔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충이 있었지만, 큰아이가 동생을 돌봐주고 남편이 틈틈이 아이들을 봐준 덕분에 끝까지 해낼 수 있었다.
석사졸업과 동시에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어린이집에 취직했다.
그렇게 나는 어린이집 교사가 되었다.
한때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고 느꼈던 내가,
이제는 아이들 곁에서 하루를 보내며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은 둘째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담임교사로 아이와 같은 시간표로 숨 쉬며 지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학비를 벌며 박사과정에 도전하고 있다.
실무 경험이 풍부하고, 각자의 기관에서 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분들과 같은 교실에 앉아 공부를 한다.
처음에는 그 자리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부담은 감사로 바뀌었다.
그분들의 말에는 이론보다 먼저 현장을 지나온 시간의 무게가 담겨 있다.
회의실과 상담실, 기관의 선택 앞에서 겪어온 고민들이 사례로 이어질 때, 나는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이런 분들과 나란히 공부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사람과 제도 사이에서 쉽게 단정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고민하는 태도.
그것이 내가 이 자리에서 배우고 있는 가장 중요한 배움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바쁘다.
이 바쁨은,
아이들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나의 인생 또한 소중히 살아가겠다는
결심이 만들어낸 현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