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려고 쓴 달기에 대한 깊은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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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된 글에 쓰였듯, 달기는 구미호 요괴를 대표하는 존재로, 구미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다. 달기에 대한 전승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일본에서 변형되고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지만, 봉신연의나 거기서 파생된 전승을 제외한 구미호 달기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잘 조명되지 않는 '여우 신격으로서의 달기'에 관한 자잘한 이야기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역세진선체도통감(歷世真仙體道通鑒)』에 따르면 후진(後晉,936-946년)의 석경당 황제의 추진 아래에서 호왕묘(狐王廟)란 '여우왕'을 모시는 사당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 여우사당은 북송(北宋,960~1127년) 시대까지 존속되었는데, 북송시대에 이르러서 선 1110년 ~ 1111년 때 재상으로 재임했던 장상영(張商英)이 수도 개봉(開封, 현대의 카이펑시)에 있던 1000개가 넘는 여우사당에 철거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 기록은 1111년 수도에 있는 1,308개의 사당을 철거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고 기록된 『송휘요집고(宋會要輯稿)』를 통해 교차 검증된다. 『송휘요집고』에 따르면, 당시 현무(玄武)와 같은 유력한 토속 신앙은 전통적인 종교 체계에 귀속되었으나, 그러하지 못한 달기(妲己), 오통(五通), 석장군(石將軍)과 같은 신앙은 불법으로 규정되어 그 사당들이 철거되었다고 한다.
두 자료를 종합해 보면, 후진 시대에 여우왕으로 봉해진 신앙과 북송 시대에 불법 신앙으로 규정된 ‘달기(妲己)’라는 이름의 신앙은 동일한 계통일 가능성이 있으며 적어도 송대에 ‘달기’라는 이름을 지닌 여우 신앙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우신 달기가 신으로 숭배받으면서도, 동시에 요사스럽게 여겨졌던 복합적인 신격이었다고 전제한다면, 주왕의 악명 높은 첩인 달기가 사악한 여우의 화신이란 통념이 적어도 북송(北宋) 시대부터 널리 퍼져있었다는 점과, 국가 차원의 여우사당 철거령이 내려지기 이전에도 송나라 관리 왕사종이 여우왕 사당을 무익한 미신이자 요언(妖言)의 근원으로 간주해 임의로 철거한 사례는, 달기란 이름의 신앙이 실재했으며 여우왕과 동일신격이란 것을 시사하는 간접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
사족으로, 임의로 여우왕의 사당을 철거했다는 송의 관리 왕사종에 대해 덫붙이자면, 그는 여우 여우사당을 철거했을 뿐만 아니라 10여 마리의 늙은 여우를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왕사종에게 여우의 저주가 내릴 것을 예측했으나 왕사종이 아무런 화를 입지 않자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여우에 대한 신앙심이 약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여우의 저주조차 피해 갔다 여겨진 왕사종은 또 다른 괴이한 것에 의해 몰락하고 마는데, 왕사종은 ‘모요(帽妖)’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이물이 등장해 백성들의 혼란과 공포를 야기한 사건, 오늘날에는 일종의 UFO 목격담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하고 만다. 왕사종을 파면에 이르게 한 이 괴이한 사건이, 어쩌면 뒤늦게 발동한 여우의 저주였을지도 모른다는 해석 또한 가능할지도 모른다.
『소양취사(昭陽趣史)』의 도입부는 달기가 구미호의 화신이란 통념을 굳히면서 전개된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은나라의 달기로 나타났던 구미호는 그 이후, 송과산(松果山)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산에 터를 잡고 여우왕국을 세웠다. 구미호 자신은 참선을 하며 도를 닦았고, 여우 백성들에게는 창과 검을 나눠주며 무술을 익히게 했다. 구미호 왕의 칭호는 '오진왕(悟真王)'이었으며, 오진왕은 묘혜(妙慧)라는 수족을 비롯한 수많은 여우들을 거느린 채 대왕으로 추앙받았다.
여우왕국이 자리한 송과산의 가장 높은 곳에는 하나의 동굴이 있었고, 그 위에는 ‘오진선경(悟真仙境)’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오진왕의 거처였다. 송과산은 속세의 때가 닿지 않은 이상향으로, 절기마다 다양한 과일이 열리고 사계절 내내 꽃이 지지 않는 아름다운 땅이었다. 오진왕은 여우 백성들에게 귀한 꽃과 진귀한 과일, 신선의 술과 음식을 마련하게 하여 잔치를 열기도 한다.
이처럼 『소양취사(昭陽趣史)』의 도입부는 구미호 달기에게 다채로운 설정을 부여하고 있지만, 결국 이 소설은 전형적인 색정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달기가 구미호의 왕이었으며 오진왕이라는 왕호까지 갖고 있다는 등의 설정은 모두, 대상화의 중심에 있는 인물 ‘합덕’의 전생을 더욱 화려하게 꾸미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합덕의 전생이 바로 이 구미호 달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진왕(悟真王)'이란 왕호는 한국고전 소설 『감자』의 '복녀'처럼 반어법적인 작명이 아닌가 싶다. 구미호 달기, 오진왕은 이름처럼 진리를 깨닫긴커녕 도교적인 덕을 몸소 실천하지 못해 벌을 받는 어리석은 인물상으로 묘사된다.
그나마 『소양취사(昭陽趣史)』의 의의라고 할 수 있는 건 구미호 달기라는 인물상의 대중적인 기본형을 정립한『봉신연의(封神演義)』란 소설을 제외한 다른 문학 작품이나 민간전승에서 달기라는 존재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드문 사례를 제공한다는 데에 있다.
물론 『소양취사』에 등장하는 구미호 달기의 인물상은 전체적으로 『봉신연의』에서 묘사된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세부적인 행적에 대한 묘사에서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첫째, 『봉신연의』에서는 달기가 은나라의 멸망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지만, 『소양취사』에서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은나라의 달기로 등장한 이후에도 죽지 않고 인간 세상을 떠나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달기가 은나라 멸망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 어딘가에 존재했다는 인식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봉신연의』의 달기는 단지 왕에게 귀속된 후궁으로만 묘사되지만, 『소양취사』에서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오진왕(悟真王)'이라는 왕호까지 갖고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는 여우왕의 사당과 달기의 사당에 철거령이 내려진 시기가 서로 동일하다는 역사적 기록과 더불어, 민간에서도 달기를 여우왕과 동일시하는 관념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지만 『소양취사』와 『봉신연의』 모두 구미호 달기를 도교의 신선이 되지 못한 채, 신선이 되길 갈망하며 어리석은 행위를 일삼는 존재로 묘사한다. 이는 전술한 데로, 달기=여우왕 신앙이 전통적인 도교 신선 체계에 온전히 편입되지 못하고, 이단적이거나 불법적인 신앙으로 간주되어 배척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봉신연의』 후반부, 은나라를 향한 역성혁명이 본격화되고 반란군이 황궁으로 들이닥치자, 그동안 궁궐 깊숙한 곳에서 머물기만 한 달기가 자매들과 함께 무장을 한다. 도화마(桃花馬)를 타고 쌍검을 든 그녀는 여장군의 모습으로 전장에 나서 반란군 진영을 기습했고, 이 돌발적인 공격은 잠시나마 반란군을 혼란에 빠뜨렸다고 묘사된다. 소설 내내 비루한 미색의 화신으로만 묘사된 달기가 유일하게 진취적인 모습을 보이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인데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른 장면을 묘사했는지 알 수는 없다, 어쩌면 달기를 비루한 인물상으로만 묘사한 것에 대한 속죄적인 서술일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정확한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없고 이렇게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도화마란 흰색 털 속에 붉은 점이 있는 아름다운 말을 가리킨다. 아름다운 여인이 타는 말로 익히 알려져 있으며 문학적으론 여성인물들의 탈것으로 주로 묘사된다. 당나라 시에는 '고운 얼굴 검은 눈썹 머릿단에 비친 붉은 치마 여인이 도화마를 타고 있다'란 구절이 있다. 한국문학 어우야담의 양웅산이 타는 말도 이 도화마라고 한다.
달기가 구미호의 화신이었다고 기록된 가장 이른 사료는 12세기 일본에서 발견된다. 중국 학자들은 이를 근거삼아 그 전부터 달기가 구미호라는 통념이 중국내에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한편으로,일본에서는 달기가 여러 나라를 멸망시킨 뒤 일본으로 건너와, ‘타마모노마에(玉藻前)’라는 여인으로 위장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전승 외적으로 보자면, 이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여우요부담인 타마모노마에 전설과 중국의 달기 전설이 융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타마모노마에 전설의 성립시기는 대략 14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14세기 후반에 쓰인 역사서 『신명경(神明鏡)』과 『타마모노조시(玉藻の草子)』에 타마모마에의 이야기가 실려져 있다. 이 무렵의 타마모마에는 꼬리가 2개 달린 7척 크기의 이미호로 묘사되고 구미호로는 묘사되지는 않는다. 한편, 중국에서 달기를 사악한 구미호와 동일시하는 민간 전설을 책으로 엮은 『무왕벌주평화(武王伐紂平話)』는 14세기 초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무왕벌주평화』는 후에 『봉신연의』의 기틀이 된다.
이렇게 중국에서 달기가 구미호의 화신이란 통념이 대중화된 시기와 일본에서 타마모노마에 전설이 성립된 시기는 둘 다 14세기 무렵이다. 그런데 달기와 타마모마에, 이 두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 합쳐진 것은 그로부터 약 5세기 뒤, 19세기, 일본 에도시대에 이르러서다.
에도시대에 꽃핀 일본의 요괴학은 일본국내에서 전해지던 기이한 전설이나 괴담을 두려움의 대상에서 오락적인 이야기로 탈바꿈시키는 동시에, 중국이나 인도에서 유래된 기존의 전설들을 일본식으로 재해석하는 일종의 ‘일본문화 개편 프로젝트’였다. 그 중심에 있었던 존재가 바로 구미호 달기, 곧 ‘백면금모구미호’였다.
에도시대 후기인 1800년대를 기점으로 일본에는 1100년대에 일본에 나타났다는 설정인 구미호 전설에 열풍이 불게 된다. 다카이 란잔(高井蘭山)의 『회본 삼국요부전(絵本三国妖婦伝)』과 오카다 교쿠잔(岡田玉山)의 『회본 옥조담(絵本玉藻譚)』은 은나라의 달기와 일본의 타마모노마에를 결합시켜 ‘백면금모구미호(白面金毛九尾の狐)’라는 존재를 탄생시켰다. 이 백면금모구미호 전설은 달기라는 구미호의 이야기를 일본식으로 재해석하며, 달기의 행적에 새로운 이야기들을 덧붙였다.
백면금모구미호 전설에 따르면, 달기는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도 주나라의 포사, 인도 마가다 왕국의 화양부인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났고, 마침내 일본에서는 타마모노마에로 변신해 나타난다. 하얀 얼굴과 황금빛 털을 가진 구미호라는 정체가 드러난 뒤엔 10만 대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위용까지 보인다. 그러나 결국 백면금모구미호는 군대와의 혈투 끝에 퇴치당하고, 그 시체는 ‘살생석(殺生石)’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 속 살생석은 실제로 도치기현에 존재하는 바위다. 백면금모구미호 전설이 워낙 널리 퍼지고 인기를 끈 나머지, 원래 존재하던 지형물에 이 전설을 덧입혀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그저 미모와 어설픈 책략밖에 가진 것이 없고, 전승 외적으로는 대상화된 요부에 불과했던 달기는, 일본에 건너와서는 ‘일본삼대악귀’라는 권위 있는 전설의 일부로 격상되며, 동시에 파격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백면금모구미호 전설은 단순히 서책화 되는데 그치지 않고, 수많은 우키요에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인형극으로도 각색되는 등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구미호 달기는 명실상부한 일본을 대표하는 요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백면금모구미호의 인기가 너무 높아진 나머지, 구미호라는 존재 자체가 달기라는 사악한 요부의 화신이자 강력한 악귀의 이미지로만 굳어지는 현상에 대해 경계하는 견해가 일본 내부에 존재했다는 점이다.
에도시대에 쓰인 쿄쿠테이 바킨(曲亭馬琴)의『남총리견팔견전(南總里見八犬傳)』에는 정목여우(政木狐, 마사키기츠네)라는 선량한 구미호가 등장한다. 정목여우는 자신이 실수로 죽인 여성이 돌보던 아이의 유모 역할을 자청하기도 하고, 찻집을 열어 나그네들을 도우며 공덕을 쌓아 구미호가 되었다고 묘사된다.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무려 천명의 생명을 구하며 ‘호룡(狐龍, 여우용)’으로 승격된다.
작중에는 정목여우가 “여우는 본래 신령스러운 동물이며, 『봉신연의』의 달기나 그 영향을 받은 타마모마에 이야기처럼 여우를 악귀로 그리는 전설은 잘못된 것”이라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작가는 정목여우의 입을 빌려, 일본의 구미호 전설이 사악한 구미호 달기의 이미지로만 덮여 씌워지는 현상에 대해 경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에서 달기와 가장 흡사한 인물을 꼽자면, 특이하게도 남성인 신돈이다. 신돈은 승려 출신의 정치인으로, 공민왕 곁에서 보좌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해 왕의 곁에서 보좌하며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 그리고 그로 인해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인물로서의 달기와 유사하다. 특히 신돈에게는 그의 정체가 여우요괴라는 아샤(訝邪) 전승까지 있는데 이는 달기와 매우 흡사하다.
달기는 나라를 망친 요부로서 이미 오래전부터 한반도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고려와 조선의 관리들은 상소문에서 주왕이 달기에 홀려 나라를 망쳤던 고사를 인용하며, 여러 가지 상소를 궁에 올린다. 왕의 곁에 아첨하는 ‘여우 같은 기인’이 붙어 나라를 그르친다는 관념은 오랜 시간 이어져왔으며, 이는 신돈을 여우 요괴로 여기는 전승에도 영향을 끼친 걸로 보인다.
여우 요괴로서의 신돈은 ‘노호정(老狐精)’이라 불리는데, 흥미롭게도 『소양취사』에서 구미호 달기 또한 자신을 ‘노호정’이라 칭한다. 이는 매우 우연스럽고도 절묘한 일치다.
조선에서도 달기는 문학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 기반이 된 것은 물론 『봉신연의』다. 『봉신연의』는 17세기 이전 조선에 전래되어 『서주연의』로 번역되었고, 이후 『강태공전』과 『소달기전』 등의 형태로 개작되며 널리 읽혔다.
『봉신연의』가 조선에서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작품 속에 비친 중국의 역사상이 조선 독자들에게도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특히 달기를 총애하며 폭정을 일삼던 주왕의 모습이, 장녹수를 총애하다 몰락한 연산군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동시에, 폭군의 몰락 원인을 왕비나 여인에게서 찾으려는 중국식 ‘여화론(女禍論)’이 이미 조선 사회에도 깊숙이 퍼져 있었으며, 심지어 그것이 중국 문학에 대한 공감대 형성원이 되기까지 했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어쨌든 달기라는 존재와, 그녀를 둘러싼 여화론적 인식은 한반도에서도 오랫동안 유통되어 온 통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 내에서 달기가 사악한 구미호라는 통념 역시 『봉신연의』를 통해 본격적으로 전파되었고 이는 조선문학에도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이화전』이라는 소설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회에 만연했던 불안감과 공포를 ‘요귀(妖鬼)’라는 상징적 존재를 통해 드러내고, 주인공의 요귀 퇴치를 통해 그 불안을 상상적으로 해소하고자 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최종적인 적으로 등장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암여우’다. 이 암여우는 요사스러운 능력을 발휘해 조선에서 행패를 부리다 궁지에 몰리자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서는 황궁에 들어가 황비가 되고,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궁궐을 혼란에 빠뜨린다.
결국 암여우는 주인공 이화가 소매 속에 숨겨 둔 보라매의 기습을 받아 퇴치당하고 만다. 이 전개는 『봉신연의』에서 달기가 주왕의 폭정을 부추기다, 강태공의 도포 자락에 숨어 있던 삼족구에게 퇴치당하는 장면과 매우 유사하다. 이처럼 『이화전』은 달기의 이야기가 조선 문학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구래공정충직절기(寇萊公貞忠直節記)』는 송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조선의 고소설인데, 이 작품에서는 표독한 성격의 유호영이라는 인물이 대놓고 구미호 달기의 환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조선의 또 다른 고소설 『쌍성성봉효록』에서는 등장인물 묘월이 동굴에서 수련하며 “이곳은 본래 구미호가 도를 닦다가 사람의 해골을 쓰고 나와 달기가 된 곳”이라고 언급하며, 달기가 미인계를 계획적으로 사용해 은나라를 멸망시켰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러한 사례들은 달기가 조선 고소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달기의 그림자와도 같은 ‘구미호’라는 상징은 조선 사회에서도 요사스럽고 간사한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시사한다.
19세기 조선의 실학자 이규경은 『호선변증설(狐仙辨證說)』에서 “민간에서는 구미호를 교활하고 간사한 존재로 여기지만, 중국의 역사 기록을 보면 본래 상서로운 동물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아마도 달기의 영향으로 인해 구미호가 조선 민간에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는 현상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옥포동기완록(玉浦洞奇玩錄)』에서도 조선시대에 달기 전승이 어떻게 향유되었는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은 한국의 옥포동을 배경으로 하며, 이 작품 속에서도 달기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이 이야기에서 지혜로운 두꺼비는 여러 동물의 조상들의 행적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나이와 지위를 과시한다. 이에 여우가 비웃자, 두꺼비는 보복하듯 여우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달기의 사악한 과거를 들추어낸다. 『옥포동기완록』 속의 달기는 아홉 개 꼬리를 가진 여우 정령, 즉 구미호로 묘사된다.
두꺼비의 설명에 따르면 달기는 상(商)나라를 멸망시킨 죄로 처형되었지만, 죽은 뒤에도 사악한 여우 정령으로 변하여 세상을 계속 어지럽혔다. 그녀의 후손들 가운데는 호리(狐羸) 와 같은 타락한 여우 무리가 있어 인간과 동물 세계에 혼란을 퍼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두꺼비는 동시에, 달기의 악행을 폭로하면서도 달기를 반대했던 ‘덕 있는 여우 씨족’ 이 분명히 존재했다고 덧붙인다. 이 의로운 여우 계열의 시조는 달기의 본성을 밝히고 그녀를 처단하는 데 도움을 준 존재로 전해지며, 그들의 고향은 영호진(令狐津, “덕 있는 여우의 여울”) 이라 불렸다.
즉 『옥포동기완록』은
달기가 수많은 여우들의 조상으로 여겨질 만큼 강대한 세력을 가졌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반대하는 ‘선량한 여우의 계보’ 또한 세상에 존재했다
는 또 다른 달기 전승의 재해석을 담고 있다.
한국에는 심지어 달기의 이름을 딴 지명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인 주왕산의 달기폭포를 비롯해, 주왕산 일대에 퍼져 있는 여러 ‘달기’ 지명들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주왕산의 ‘주왕’은 우리가 흔히 아는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 주왕이 아니다. 이 산에 얽힌 전설에 따르면, 당나라 때 반란에 실패하고 신라로 도망쳐온 주도(周鍍)라는 인물이 신라군에게까지 쫓기다 주왕산에 몸을 숨겼고, 결국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주왕산이라는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마도 후대 사람들은 주왕이란 이름을 당나라의 반역자 주왕이 아닌,은나라의 폭군 주왕으로 오해한 듯하다. 그 결과 주왕산 일대에는 은나라 주왕의 짝으로 알려진 달기의 이름이 붙은 지명들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옛 한반도 사람들은 ‘주왕'이라는 호칭을 듣자마자 달기를 먼저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지명에까지 달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달기라는 독특하고도 기묘한 인물이 한반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