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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un 04. 2024

발은 젖은 눈썹 날개를 달고

  남자는 발을 내보이고 있었다. 발은 노을이 드리운 하늘처럼 부어 있어 바짝 마른 아버지와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처음 본 사람은 웃음이 나올지 모르지만, 이 희극처럼 보이는 상황을 이해하는 순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막혀와 숨을 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아직은 발로 몸을 지탱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 비 온 뒤에 쉽게 잡초를 뽑는 일처럼 쉽게 뽑혀 나갈 줄 알았던 아버지의 발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3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생의 바닥에 뿌리를 박고 있다.

  뼈가 다 드러난 남자의 손이 마치 미라의 뼈처럼 영혼이 다 빠져나가고 남은 껍데기를 연상하게 하는데, 여기에 반해 발은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생을 안간힘으로 붙잡고 있다. 벽에 발을 붙이며 기어오른 담쟁이가 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마지막까지 벽을 붙어 있는 모습 같다. 나는 뭔가에 이끌린 듯 남자에게 발을 문지른다. 남자의 발은 눈이 덮인 마당을 맨발로 걷다 온 듯 차가워 나는 깜짝 놀란다. 얼음처럼 차가운, 설인 같은 남자가 멍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마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어스름이란 생각이 든다.

  한 생의 스펙트럼을 통과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화살과 같아서, 흘러가 버린 물과 같아서, 다시는 돌아오지는 순간들의 연속 같아서, 어떤 위로를 건넬 수 없는 막막함 같아서 나는 남자의 시간을 흘러가게 놔둘 뿐이다. 남자도 이 세상에 나올 때 발을 내밀었을 것이고 땅을 딛고 걸었을 것이고 이 세상의 중력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나 남자는 이제 중력을 벗어버리려는 듯 저 먼 허공을 바라본다. 마침내 영혼의 눈빛에서 날개가 돋아 날아갈 듯 바동거리는데 남자는 뭔가를 붙잡고 있는 듯 떠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어릴 때 가장이 된 이 남자의 날개는 지상에서 발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날개를 붙든 것은 홀로 되신 어머니였을 것이고 나이 어린 동생들과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가장의 책임감이었을 것이다. 남자의 날개는 땅에 더 깊숙이 박고 살았다. 일을 마치고 온 다음 남자가 하루를 정리고 한 일이 발을 씻는 일이었는데 이 씻는 일이 노동과 고됨과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을 씻어내는 일이었다. 남자는 발가락 사이를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씻어가며 대야에 찬 노을빛을 내일을 향해 흘려보내며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조금씩 부리고 있다는 위안을 얻었을지 모른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화장실에 다녀와야겠다고 일어선다. 한 발 걷다가 한 번 휘청이더니 다시 중심을 잡는다. 남자는 놀란 나를 괜찮다고 뿌리치고 자신의 뿌리가 아직 건재하다는 듯 발을 딛는다. 부축하는 손을 떼어놓고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 남자가 걱정인 나는 문 앞에서 서성이는데 여자는 남자의 차가운 발에 신길 양발을 고른다.

  양말을 모두 꺼내 크기가 맞는지 두께가 맞는지 어림짐작으로 맞추어나가다가 용케 하나 찾았는지 내게 보여준다. 꽃무늬가 있는 두꺼운 버선으로 바닥에는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한 고무가 붙어 있다, 나는 남자의 발에 신겼던 양말을 바라본다. 양말과 함께 운동화와 장화, 구두와 털신, 그리고 흰고무신이 남자의 발과 한때의 시간을 보냈다. 남자는 흰고무신을 즐겨 신었는데, 비가 올 때면 나는 남자의 흰고무신을 가지고 나가 배를 만들어 놀다가 혼난 기억을 지니고 있다. 어떤 기억은 오래도록 붙어 떨어지지 않는 접착 성분을 지니고 있다.

  한참 동안 화장실에 있던 남자가 나오자 여자는 남자의 발에 버선을 신겼다. 남자는 자신의 발을 바라보며, 여자 것인디, 하고 여자는 여자 것인 게 예쁘지요, 하면서 남자의 기분을 풀어준다. 남자는 이 세상에 태어나 여자의 발을 가져본 것인데 전 같으면 화를 냈을 남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버선발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남자는 나를 보면서 너희들한테 걱정만 끼친다고, 아픈 것이 마치 죄인 듯 푸념하고 여자는 마음을 편히 가지시라고 위로를 하는데 남자가 문득 성호를 긋는다.

  성호 안에는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시간이 담겨 있는 듯 경건하게 보였다. 이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야 쓰것다, 하는 말이 마치 이 세상에 남겨진 모든 존재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신이 사람에게 준 신체 중에 발처럼 성실하고 정직한 종이 있을까. 발은 걷는 일 하나로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다. 발이 없으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휠체어를 탈 수도 있고 자동차를 탈 수 있지만, 자력으로 걷는 일. 땅과 하나 되는 경험은 발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발은 땅과 접촉할 뿐만 아니라 교감한다. 그런 의미라면 짐승도 새도 나무도 바위도 강물도 발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서 있는 발이든, 움직이든 발이든, 발을 지니고 살아가는 일은 땅과 호흡하고 대지의 신과 교감하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만일 인간이 죽어 이 세상에 발을 남겨 놓는다면 영혼은 땅 대신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남자의 성호는 날개처럼 남자의 영혼을 이끌고 신의 영역으로 날아갈 것이다.

  침대에 누운 남자의 발바닥이 마치 한 생의 기념비처럼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발바닥이 한 생이 피워낸 불꽃 같다가, 파릇하게 올라오는 잎 같다가, 땅에서 얻은 무와 당근, 파, 배추, 시금치 등이 쌓인 시장 같다가, 망자가 들어가는 관 같다가,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은 폐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닳아지고 닳아져 이제는 뭉퉁한 빗자루 같은 발바닥은 모든 존재는 원이라는 듯 둥글둥글하다. 이미 죽은 존재도 아닌, 죽어가는 존재도 아닌, 죽지 않은 존재도 아닌, 죽지 않을 존재도 아닌 비석처럼 서 있는 남자의 발바닥은 생의 지점에서 죽음의 지점으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한 존재를 경건하게 지켜주고 있다.

  눈을 감고 잠이 든 남자의 젖은 눈썹이 떨린다. 떨리는 눈썹을 날개로 달고 발이 날아가려는 듯 파닥인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숨을 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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