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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un 06. 2024

집에 관한 단상


   집처럼 다양한 가치를 담고 있는 공간이 있을까. 집은 혼자 살아도 혼자 사는 공간이 아닌 소통의 공간으로 작용한다. 커뮤니티의 공간인 집을 통해 생각과 가치가 구현된다. 초가집, 기와집, 너와집, 귀틀집 등 무엇으로 집을 지었는지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일본은 나가야, 료칸, 적산가옥이 주우국에 사합원, 토루, 구룡성채가 북극에는 이글루 몽골에는 게르, 인도 유럽에는 방갈로 등이 존재한다. 가장 흔한 집은 아파트다.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잠을 자고 쉼을 얻는 장소다. 


  또한 집은 나의 배필이다. 내가 집에 관심을 주지 않고 방치하면 사랑이 떠나가듯 냉랭하게 나를 대한다. 집은 가꿀수록 아름다워지는 배우자와 같다. 처음 만날 때는 낯설고 서먹한 사이처럼 집도 처음 대하면 서먹하고 낯설다. 첫인상이 좋은 집이 있고 첫인상은 그저 그렇지만 점점 좋아지는 집이 있고 첫인상은 안 좋지만 갑자기 180도 달라지는 집도 있다. 모두 집이다. 첫인상이 좋아도 살다보면 부부가 얼굴을 붉히는 일처럼 집도 공간이 비좁게 느껴지기도 하고 물이 새기도 한다. 어떻게 할까? 부부도 부족한 부분은 메우면서 살아가듯이 고쳐가면서 사는 수밖에 없다. 


  살아가는 일의 중요성을 집을 통해서 알게 된다. 집은 하나의 세계이자 우주이다. 집에서 상처를 입고 집에서 행복하고 집에서 꿈을 꾸고 집에서 안식을 얻는다. 영혼의 집은 천국이자 극락이다. 모두가 집이 있다. 바둑에서 집을 짓듯이 개개인은 서로 모여 집을 짓는다. 지구가 하나의 집이고 나라가 하나의 집이고 도시가 하나의 집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의 사상이 집이고 신념이 집이고 믿음이 집이다. 집이 무너지면 살 수 없듯이 신념도 믿음도 사상도 무너지면 살 수 없다. 그러니 모두들 자신의 신념과 사상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가. 집이 곧 존재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나의 문학도 한 채의 집이다. 시의 방, 소설의 방, 수필의 방, 시조의 방으로 마련된 집을 짓고 살아간다. 그러니 삶은 수많은 방으로 이루어진 한 채의 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방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는 각자가 다를 것이다. 바둑으로 인생을 산 사람이 있고 차로 인생을 산 사람이 있다. 나는 문학으로 나의 인생을 살 것인가. 나는 생각으로 깊이 침잠한다.


  죽음도 집이 될 수 있을까. 죽음이 생의 집이 될 수 있다면 죽음도 생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집을 나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태어난 고향을 떠나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듯 우리는 태어남의 순간과 죽음의 순간이 오히려 공통 분모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나가있는 시간이 많아서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우리의 생은 애초에 죽음에서 왔는지 모르지 않는가.


  혹자는 생과 죽음의 차원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생이 그저 생인가 죽음이 그저 죽음인가. 어쩌면 생과 죽음은 다른 차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살아 있어도 죽은 상태로 있는 죽었어도 살아 있는 ‘동안’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살아 있으나 영혼이 죽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죽었으나 영혼이 살아 후세에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누가 살아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정말 살아 있는가. 숨을 쉬고 밥을 먹는다고 해서 우리는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집으로 돌아가듯이 모든 생은 죽음으로 귀착한다. 멀리 떠난 사람도 죽음을 향해 돌아오지 않는가. 그러니 삶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자 삶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동안’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돌아갈 죽음의 순간을 미리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관에 누워 보듯 우리의 삶이 더 싱싱해지지 않을까. 집은 나의 영혼에 평온을 주는 곳이다. 삶도 죽음도 그랬으면 좋겠다.


  집은 안일까 밖일까. 우리는 쉽게 안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사실 집은 안과 밖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곳이다. 안이 혼자 평안할 수 없고 밖이 혼자 꽃필 수 없듯이 안과 밖이 사랑과 배려와 조화되는 곳. 나는 이런 집을 꿈꾼다. 그래서 마당이 있는 집을 흠모한다. 안과 밖을 잘 가꾸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의 내면와 외면이 잘 조화되기를 꿈꾼다. 나는 외모 콤플렉스와 내적인 트라우마가 공존하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 대다수는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내면이 평온이 얼굴로 드러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행복하다. 그 사람은 좋은 집을 짓고 가꾸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집 한 채 짓고 싶다. 가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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