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차, AI라는 파고 앞에서 다시 묻는 존재의 속도
정직하게 길을 닦아온 시간이었다.
누군가 ‘정체된 길’이라 낮잡아 보던 현장에서 나는 매일 성실의 보폭으로 걸었다.
퇴직이라는 정박지가 보일 무렵, 안식의 확신이 손에 잡힐 듯한 바로 그때, 세상은 갑자기 다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AI라는 거대한 파고가 일렁이고, 노동 없는 부의 화려한 격랑이 귀를 때린다.
밤을 지새우며 쌓아 올린 나의 숙련은 ‘기계의 잔상’이라는 조소 섞인 문장 속에 갇힌다.
나는 평생 믿고 걸어왔던 그 단단한 길 위에서, 홀로 길을 잃은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솔직히 두렵다.
나만 시간을 멈춘 채 남들 모두 저 너머의 속도로 달려가는 듯한 현기증이 밤마다 찾아온다.
‘이대로 그럭저럭 소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가 숫돌처럼 내 안의 존엄을 깎아낸다.
그러나 문득 깨닫는다.
이 지독한 ‘뒤처짐’의 감각이야말로,
내가 아직 멈추지 않았다는 가장 선명한 증거임을.
안주하려는 영혼은 속도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오직 진짜를 갈망하는 자만이 발밑의 간극에 고통스러워한다.
나는 오늘, 이 불안한 흔들림을 소멸의 징후가 아닌 성장의 신호로 받아들인다.
겉으로는 평온한 중견 관리자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거친 파도 속에서도 나는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그것은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명예와 가족의 고요한 평온을 지키기 위한 고유한 몸부림이다.
세상의 소란에 일희일비하며 내 보폭을 흐트러뜨리지 않겠다.
발은 고단해도, 사유의 다리는 여전히 내가 정한 방향을 향해 걷고 있다.
나는 27년의 시간을 견뎌낸 것이 아니다.
지금, 나만의 새로운 물길을 트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