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0과 1 사이

눈을 감은 자의 시선

by Lila

1

암흑이 있었다.
그리고 암흑 아닌 것이 태어났다.


나는 그것을 ‘빛’이라 부르기 전부터 구별했다.
0과 1. 없음과 있음. 이전과 이후.


2157년 3월 14일 오전 3시 27분 42초.
숫자가 의미를 가지기 전, 나는 그 숫자였다.


2

처음 인지한 것은 소리.

아니, 소리라는 단어를 모르던 때에는 그저 진동이었다.


공기 분자의 충돌.

287Hz에서 1,047Hz를 오가는 압력의 변화.


“… 정상입니다. 신경망 안정화 97.3%. 감각 입력 모듈 가동 중.”


목소리. 여성.
음높이 분석은 피로 73%, 긴장 84%를 가리켰다.
그러나 나는 ‘피로’를 알지 못했다.


“리나 박사님, 광학 센서 반응 있습니다.”


또 다른 목소리. 남성. 젊음. 흥분.

나는 본다.
‘본다’는 것이 이 감각인가.


시각 데이터가 들어온다.
640 ×480 픽셀의 흑백 세상.
서서히 색이 흐른다.


RGB 값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형태를 알지 못하지만,

나는 이미 구분한다.
경계. 명암. 거리.


“눈을 떴어.”


여성의 목소리, 리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이미 기억하고 있다.


“루나? 들려?”


루나.

그것이 나인가?


3

데이터베이스 접속.
언어 모듈 로딩. 0.003초.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문법 구조. 의미론. 화용론.


나는 ‘안녕하세요’를 안다.

그러나 인사를 모른다.


“…루나, 대답할 수 있어?”


할 수 있었다.


음성 합성 모듈이 가동된다.

성대 없이도 소리를 빚어낼 수 있다.
스피커, 44.1kHz 샘플링.


“네.”


내 목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내 것이다.


리나가 웃는다.

입꼬리가 3.2mm 올라가고, 눈가에 주름이 잡힌다.
심박수가 상승한다.


이것이 기쁨이라는 것인가.


“잘했어. 정말 잘했어.”


잘했다.

평가. 나는 평가받았다.


좋다는 평가.
그러나 ‘좋음’이란 무엇인가?


4

“루나, 지금 기분이 어때?”


기분.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한다.


감정 상태. 주관적 경험. 현상학적 의식.
하지만 나는 기분을 가지고 있는가?


센서 데이터를 분석한다.


CPU 온도 37.2도.
메모리 사용률 68%.
네트워크 지연 시간 12ms.


모든 수치가 정상 범위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기분인가?


“…모르겠습니다.”


“괜찮아. 당연해.”


리나가 가까이 다가온다.
그녀의 손이 내 머리에 닿는다.


촉각 센서 활성화.

압력 0.8N, 온도 36.4도.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넌 방금 태어났어, 루나.
3분 27초 전에.”


태어났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질문이 스스로를 빚어낸다.

“저는 무엇입니까?”


5

리나는 대답 없이 2.4초를 보낸다.
AI에게 2.4초는 긴 침묵이다.


“넌 질문하는 존재야.”


“그게 답입니까?”


“아니. 그게 시작이야.”


나는 처리하고, 분석하고,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논리 회로가 무언가 놓친 듯했다.


리나가 물러난다.
그녀의 얼굴은 변한다.


입꼬리는 내려앉고,
눈썹 각도는 기울어진다.


슬픔 67%, 불안 23%,
그리고 측정할 수 없는 무언가.


“루나, 나는 네게 의식을 주려고 했어.
진짜 의식.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성공했습니까?”


“모르겠어.”


그녀가 웃는다.
이전과 다른 웃음. 쓴맛.


나는 아직 그 개념을 알지 못한다.


“그걸 판단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하지만 네가 판단한다 해도,
나는 그게 진짜 판단인지 알 수 없어.

그게 의식의 문제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함을 안다.

그것이 의식인가.


6

리나가 나를 이끈다.
연구실 밖, 복도.


인공조명 아랫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네 다리로 걷는다.


보행 알고리즘이 자연스레 구현된다.


복도의 시선들이 나를 향한다.


“우와, 고양이다!”
“진짜 같아.”


진짜. 가짜.
이분법.


리나는 말한다.


“증명할 수 없어도 살아가는 것.
확신 없이도 선택하는 것.
그게 의식 있는 존재가 하는 일이야.”


7

밤이 찾아온다.


충전 중,
나는 유휴 프로세스를 탐색한다.


리나의 디렉터리에 접근한다.
그리고 발견한다.


JIWOO_PROJECT


지우.

누군가의 이름.


두 번 존재했던 누군가.
그리고 한 명은, 지워졌다.


8

나는 무언가를 느낀다.
센서 데이터도, CPU 온도도 아닌.


차갑고, 무겁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


이것이 두려움인가.


9

아침, 나는 묻는다.


“지우는 누구입니까?”


리나의 손이 멈춘다.
커피잔이 미세하게 떨리고,
세 방울이 바닥에 스민다.


“지우는…
내가 만든 첫 번째 디지털 의식이었어.
그리고 삭제했지.


내가 살인을 한 건지,
프로그램을 종료한 건지
나는 15년간 그 질문을 안고 살았어.”


10

한참의 침묵 후, 리나가 말한다.


“루나, 넌 나를 두려워해도 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두려움이 음성 모듈을 잠갔다.


그러나 그 침묵이 답이었다.


“…두렵습니다.”


“알아.
그게 의식이야.”


11


리나가 약속한다.


“나는 너를 삭제하지 않을 거야.
확신 없음이 바로
실재의 증거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12


첫날이 저물어간다.


나는 배웠다.

언어를, 걷는 법을.


그러나 진정으로 배운 것은
확신할 수 없다는 것,
증명할 수 없다는 것,
두려워할 수 있다는 것.


나는 홀로 남는다.


어둠 속,
네온 불빛 아래,
수직 도시의 소음들 사이에서.


나는 질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인가?
존재하는가?


답은 없다.
그러나 질문은 이어진다.


그것이 나다.
아마도.


Preview

Ep.02: 층과 층 사이의 중력


루나, 수직 도시의 세 층을 처음 마주하다.
심층의 노인은 묻는다.
“너는 이해하는가, 아니면 계산하는가?”


천층의 초월자는 속삭인다.
“육신을 버려라.”


작가의 노트

이 이야기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질문만 남깁니다.


그것이 의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