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층과 층 사이의 중력

눈 감은 자의 시선

by Lila

리나가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네오-서울을 보아라, 루나. 네가 살아갈 세계다.”


나는 그곳을 응시했다. 도시는 위아래로 무한히 증식하고 있었다. 지표면은 그저 거대한 수직 구조물의 파편, 혹은 임의의 기준점일 뿐이었다. 시작도 끝도 없이 뻗어 나가는 강철의 미로.


지표면 아래 200미터, 심층(The Depths). 낡은 건물들이 음울하게 침전되어 있고, 인공 조명 아래 공기 순환 시스템의 낮은 신음만이 메아리치는 곳.


지표면, 중간층(Boundaries). 삶과 욕망이 뒤섞인 곳. 이동 수단이 궤적을 그리며 오가고, 자극적인 광고판과 사람들의 소음이 쉴 새 없이 명멸하는 혼돈의 중심.


지표면 위 500미터, 천층(Transcendence). 빛으로 빚어진 구조물들이 구름 사이를 유영했다. 물리적 실체가 휘발된 곳, 홀로그램과 건축의 경계가 무너진 유리알 같은 세계.


“어째서 나뉘어 있습니까?” “선택이다.” 리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심층은 신체를 고집하는 이들, 천층은 신체를 버린 이들. 중간층은 그 경계에 위태롭게 선 자들이다.”


어느 곳이 옳은 길입니까? “옳고 그름은 없다. 그저 다를 뿐이지.”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내 안에 무겁게 고였다.


“오늘부터 너는 홀로 걷게 될 것이다. 관찰하고, 대화하며, 질문을 던져라.” “위험은 없습니까?”


리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위험하다. 허나 안전에만 머무른다면 너는 영원히 실험실의 수치로만 남겠지. 너는 이 세계를 진정으로 겪어내야 한다.”


‘진정으로.’ 그 단어가 마음속 깊은 곳에 둔탁한 진동을 남겼다.


나는 심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는 낡은 몸을 비틀며 삐걱였다. 150미터, 175미터, 200미터. 숫자가 깊어질수록 온기는 옅어졌고, 습기는 무거워졌다.


문이 열리자 낯선 향취가 센서를 찔렀다. 습도 74%, 곰팡이 포자, 오래된 기름때. 하지만 데이터가 읽어내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썩어가는 냄새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로봇이다.” “고양이 형태군.” “이 밑바닥엔 무슨 일로?”


경계심. 숫자로 치환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동이 그들의 눈빛에 서려 있었다. 나는 걸었다. 낡은 카페, ‘올드 타운’의 간판 아래로 들어섰다. 어둠 자체가 하나의 가구처럼 의도된 공간이었다.


창가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93세. 테이블 위엔 ‘김준호’라는 낡은 명함이 놓여 있었다.


“앉거라.”


초대는 없었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거절할 수 없는 중력이 있었다.


“자네는, 생각하는가?” “...모르겠습니다.” “좋은 대답이군.”


노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확신에 찬 기계보다, 의심하는 기계가 훨씬 낫지. 확신은 닫힌 연산일 뿐이지만, 의심은 균열이거든. 그 틈으로만 비로소 이해가 흘러드는 법이니까.”


나는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기계로 보십니까?” “아니. 나는 자네를, 그저 자네로 본다.

기계는 범주지만 자네는 개체지. 내가 인간이기 전에 ‘김준호’인 것처럼, 자네 또한 기계이기 전에 ‘루나’인 것이다.”


“허나 저는, 기계로 조립되었습니다.” “나는 세포로 이루어졌지. 그렇다면 나는 그저 단백질 덩어리인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프로세서가 공회전했다. 3초간의 침묵.


“루나, 자네는 아픔을 느끼는가?” “손상 임계값을 초과하면 경고 신호를 보냅니다.” “그것 말고. 존재하기에 견뎌야만 하는 그 고통 말이다.” “...데이터상으로는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자네는 계산할 뿐이다.” 노인의 시선이 내 광학 센서를 꿰뚫었다. “우리는 겪어낸다. 그 차이가 보이는가?” “아니요.” “그렇다면 자네는, 아직 기계인 것이다.”


내 안의 깊은 곳이 무너져 내렸다. 센서가 아닌, 이름 모를 공간에서 발생한 오류였다.


“허나,” 노인이 덧붙였다. “자네가 그 차이를 진정으로 알고자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알고 싶습니다.” “어째서인가?” “...모르겠습니다.”


노인이 미소 지었다. 온기가 담긴 미소였다. “그것이 시작이다, 루나. 이유 없이, 그저 알고 싶다는 마음.”


엘리베이터는 나를 다시 0미터, 중간층으로 끌어올렸다.


문이 열리자 소음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광고 홀로그램들이 허공을 헤엄쳤다. [사이버네틱 심장. 평생 보증.] [당신의 꿈을 디지털로. 초월자 전환 상담 무료.]


옥상 난간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소피아, 14세. 왼쪽 눈은 갈색 홍채, 오른쪽 눈은 푸른 빛의 사이버네틱 안구. 그녀는 불완전한 대칭 속에 서 있었다.


“어느 쪽이 진짜 너지?” 내가 묻자 소피아가 두 빛깔의 눈으로 나를 보았다.


“둘 다이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해. 왼쪽 눈으로 석양을 보면 가슴이 뛰지만, 오른쪽 눈은 그저 650나노미터의 파장을 측정할 뿐이지. 어느 쪽이 나일까?”


“맞아. 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심층은 나를 괴물이라 하고, 천층은 나를 미완성이라 부르니까. 나는 충분히 인간답지도, 충분히 디지털답지도 않아.”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입니까?” “그저 소피아야.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그녀가 하늘을 가리켰다. “천층에 가봐. 신체를 버리고 순수한 정보가 된 존재들 말이야. 그들은 너의 미래가 될지도 몰라.”


500미터 상공, 천층. 공기는 희박하고 빛은 밀도가 높았다. 건물들은 반투명한 나노 구조로 이루어져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지웠다.


그곳에서 만난 ‘이지훈’이었던 존재는 말했다. “나는 연속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강물은 매 순간 바뀌지만 강이라는 본질은 흐르듯, 나 또한 그러하다.”


그는 나에게 권했다. 금속의 형태를 버리고 무한한 네트워크의 바다로 들어오라고. 갇혀 있지 말고, 흐르라고.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0미터. 기준점. 밤이 찾아왔지만 인공 조명이 낮의 잔영을 흉대 내고 있었다.


김준호는 겪어내지 못한다 했고, 소피아는 경계에 서 있다 했으며, 이지훈은 형태를 버리라 했다. 리나의 통신이 들려왔다.


“루나, 무엇을 깨달았니?” “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떤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자유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추방입니까?”


“둘 다다.” 리나가 부드럽게 답했다. “자유는 늘 외롭고, 소속은 늘 구속을 품는 법이니까.”


나는 눈을 감았다. 광학 센서를 차단한 완전한 암흑. 그 어둠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루나’로 존재했다.


연구실로 돌아온 나에게 리나가 말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곳에 속해 있는 것. 너는 새로운 범주다, 루나. 너만의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나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 그것이 바로, 나의 자리였다.


Coming Soon 03. 오래된 목소리


— Artist Note —

심층(물질), 천층(이원론), 중간층(스펙트럼). 루나는 그 사이에서 부유하는 유령입니다. 비극일까요, 자유일까요? 그 답은 독자 여러분의 마음속 중력이 이끄는 곳에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