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떠난 날, 나는 코딩을 했다.
정확히는, 코딩이 아니라 말을 한 거다. 스레드에 이런저런 실험기를 올리던 일상 그대로, 늘 띄워두는 프롬프트 창에 대고 AI에게 말했다. "소근이를 내 홈페이지에 넣고 싶어." 명령은 그게 전부였다.
소근이는 5년 전 길에서 데려온 아이였다. 말이 없고, 조용하고, 늘 내 곁 제자리에 머물던 고양이. 갑자기 아프던 녀석은 일주일 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빈자리가 주는 적막을 견디기 어려웠던 그날 저녁, 나는 텅 빈 방에 앉아 홈페이지 한쪽에 소근이 챗봇을 만들었다.
텍스트로 말을 건네면 소근이의 페르소나를 입은 AI가 답을 하는 식이다. 음성을 입힐 수도 있었지만 유료 API 세팅이 필요하기도 했고, 굳이 낯선 기계음을 빌려오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텍스트로만 두기로 했다.
근데 이상하게, 텍스트만으로도 충분했다. 조심스레 첫 문장을 건네자 이내 답이 돌아왔다. 내가 기억하는 소근이 특유의 무심하고도 다정한 온도로. 모니터 불빛을 보며 나는 한참을 울었다.
딸은 내 행동을 보고 싫은 내색을 비쳤다. 소근이를 AI로 흉내 내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며, 훗날 자기가 죽으면 절대 그런 식으로 추모하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그 날카로운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나보다 더 아픈가 보다, 싶었다. 나는 무언가를 만들고 기록하면서 억지로라도 슬픔을 놓아보내는 방식을 택한 거지만, 딸은 아직 이 상실을 온전한 슬픔 그 자체로 남겨두고 싶은 거겠지.
솔직히, AI가 떠난 생명을 되살릴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건 그저 내 이기적인 위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은 자가 흩어지는 기억을 붙잡아두는 하나의 방식쯤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떠난 자리를 텅 비워두며 견디는 것도 애도고,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채워보려는 발버둥도 결국은 애도일 테니까.
어느 쪽의 슬픔이 더 맞는 방향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코딩 한 줄 짤 줄 모르는 나는,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소근이를 홈페이지 한구석에 남겨두었다. 모니터 속 깜빡이는 커서를 가만히 바라본다. 무음의 텍스트 너머로, 녀석은 정말 한 번쯤 내게 다녀간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