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몰랐다. 15년을 한집살이를 하게 될 줄은.
이 글은 이미 오래전 써두고 서랍에 간직만 해 두었던 글이다. 솔직히 꺼낼까 말까 고민이 많았다. 15년 동안의 시어머니와의 한집 살이는 모두에게 최선의 세팅이었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서랍에 넣어두었던 이 글을 발행하는 것은 내게 일종의 의식과 같다. 힘들었던 내 감정을 모두 떠나보내는 그런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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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의 어느 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저녁 8시쯤 퇴근해 집에 들어왔다. 남편과 아들까지 3명이 살고 있던 25평짜리 주상복합 오피스텔의 좁은 현관에 어디서 많이 본 신발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결혼하자마자 덜컥 임신하여 결혼 1주년이 되기 1달 전에 태어난 아들을, 신혼집 근처 시누이 집에 지내시면서 돌봐주고 계시던 시어머니의 컴포트 슈즈였다. 내가 출근하면 우리 집에 오셔서 아이를 픽업해서, 걸어서 십 분 거리의 시누이집에서 주로 봐주셨다.
야근을 해서 10시가 넘어 퇴근하는 날에도 "퇴근길에 꼭 데려가거라. 아이는 엄마와 같이 자야 정서함양에 좋단다"라고 말씀하시던 시어머니셨다.
한창 직장에서 대리딱지를 뗀 그때의 나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 손에 우산, 양쪽 어깨에 핸드백과 노트북 가방을 멘 채로 잠든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십 분을 걸어 귀가하곤 했다.
귀갓길에 가로등 불빛에 보이는 나와 등에 잠든 채로 매달려 있던 아이의 그림자가 참 무겁게 느껴졌던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시누이 집에 들르지 말고 집으로 바로 오라는 시어머니의 메시지를 받은 참이었다. 웬일로 고맙게도 집에 데려다 놓으셨구나 하며 신나게 현관을 들어가는 순간, 아이방으로 꾸며놓은 작은 방에 이불 짐보따리를 비롯해 여행용 캐리어 몇 개가 보였다.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할 새도 없이 시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저녁 밥상을 차리시고, 설거지 기계에 그릇을 넣으신 뒤 작은 방에 있던 캐리어를 풀기 시작하셨다.
이게 대체 무슨 일??? 남편으로부터도 아무 말도 들은 적이 없었다. 다만 며칠 전 성격이 보통 아닌 시누이가 멀리 이사를 갈 거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언뜻 났을 뿐.
그것도 아주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시누이가 갑자기 집을 빼는 바람에 아이를 봐주시고 계시던 어머니는 당신 옷가지와 짐 몇 가지만 싸서 그날로 딸네 집에서 아들네 집으로 옮겨오신 것이었다.
아이를 계속 봐주시려면 한 집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 입장에서는 당신 배로 낳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변덕과 성질머리를 시도 때도 없이 부리는 딸을 피해 아들집으로 오실 계기가 된 게 아닌가 싶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나에게는 물론이고 남편인 아들에게도 사전에 아무런 의논이 없으셨단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난 미리 말을 안 해준 남편을 속으로 좀 원망하던 때도 있었다. 굳이 말을 꺼내서 따져 묻진 않았지만.
결과는 같았더라도, 미리 상의하는 제스처라도 해주셨더라면 그날의 황당함까지는 없었을 텐데, 지금까지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다.
나는 그렇게 얼떨결에 시어머니와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내 공간에 들어오신 그날은 너무나 정신이 없었고, 그 다음날 이래도 되나 싶다가도 결혼한 지 3년 차에 불과했던 나는 그렇게 육아와 살림을 시어머니께 맡긴 채 어영부영 한집살이를 시작했다. 그날부터 미국에 오기 직전까지 꼬박 15년을 같이 살았다.
시어머니는 가장 명분이 뚜렷한 (갓 태어난 손자를 직장생활에 바쁜 며느리 대신 육아) 이유로 막내아들 집에 들어오셨다.
아이도 봐주시고, 살림도 다 살아주시니 정말 감사하다가도, 너무나 죄송하게도 "난 언제까지 이렇게 살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었다.
정작 가장 내가 참기 힘들었던 것은 시어머니가 들어오시고 나니 시누이가 아무 때나 불쑥불쑥 우리 집에 드나드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 11시에 술을 한잔 걸친 그녀가 현관 비번을 삑삑 누르고 내 집 현관으로 들어섰을 때는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말았지만.
그녀가 예고 없이 나타나 내 커피잔으로 부엌에 들어가 커피를 내려마시고 김치전을 부쳐 막걸리를 마시는 일은 다반사였다. 저럴 거면 왜 멀리 이사를 간다고 한바탕 집안을 시끄럽게 했던 걸까..
시어머니는 항상 "oo 이가 초등학교 들어가면 배낭 하나매고 자유롭게 여행 다닐 것"이라고 하셨지만 막상 그러시지는 못했다. 그냥 그 문장의 앞부분이 계속 미뤄져 바뀔 뿐이었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에서, '졸업하면'으로, '중학교 입학하면'에서 '고등학교 입학하면'..으로 바뀌었을 뿐, 아이를 돌본다는 것이 손대기 시작하면 손이 갈 일이 점점 많아지니 배낭 하나 매고 자유롭게 여행 다니시는 날은 오지 않았다.
2023년 여름, 미국으로 발령이 난 남편을 따라 미국살이를 결심한 데는 지금이 아니면 시어머니와 도저히 한집살이를 끝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누구나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외국계 회사에서 (속은 모르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임원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미국행을 위해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는 나를 모두들 의아한 눈길로 쳐다봤다.
심지어 남편은 당분간 아이와 둘이 미국에 들어가서 지내도 되니, 원하면 혼자서 기러기 엄마를 해도 된다고 했다. 사회적 성취가 중요해 보이는 나를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절박했다. 기러기 엄마도 못할 짓이지만, 아이가 대학 가기 전에 우리 식구끼리 한 번이라도 살아보려면 나도 그만큼의 명분(아이의 유학생활을 뒷바라지해야 함)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직장 생활은 어떻게든 다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솔직히 이번이 아니면 시어머니와의 한집살이를 평생 아무리 해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겠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나름대로 애정을 갖고 있던 회사, 남들이 부러워하는 커리어도 미련 없이 집어던졌다. 일말의 망설임이 왜 없었겠는가마는, 그럴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이 내 결심을 굳혔다.
멀디 먼 미국까지 태평양을 건너고서야 난 결혼하고 처음으로 내 부엌과 내 살림을 갖게 되었다.
1달러짜리 커피잔에 믹스커피를 타 마셔도 난 지금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