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운, 살리는 건 노력 II-2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잖아.

by Alex in Irvine

맨땅에 헤딩을 해서 피를 철철 흘린 이야기.. 를 꺼내려니 이미 세월이 많이 지나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아직도 아리다. 딱지가 앉다 못해 굳은살이 생긴 줄 알았는데 상처는 상처인 듯하다.


대관업무를 시작하고 첫 육 개월 동안 닥치고 전진했지만,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팍 상한 것도 잠시, 내가 그간 어떤 것을 했고, 그것이 왜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는지 고민을 시작했다.


대체 대관업무의 성과란 무엇일까?

목표는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가 측정되는 것이 요원한 업무가 바로 대관업무였다.

회사의 사업에 유리하도록 주요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여 목적한 바를 이뤄내는 작업은 하루, 이틀, 육 개월, 일 년, 삼 년, 오 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그럼 그동안에 그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했던 작업들은 냉정히 말하면 수면 밑에 있어 보이지 않는 오리의 처절한 헤엄질일 뿐이었다.

처절한 헤엄질 끝에 목적지에 다다를지, 아니면 헤엄치다 지쳐 가라앉을지 모르는, 아무런 개런티가 없는 일이라고 느껴졌다. 이제껏 해온 커뮤니케이션 일, 결과가 바로바로 보이는 일과의 가장 큰 차이였다.


대체 뭐를 하라는 건지는 잘 몰랐어도 우선은 이 일에 대해 누가 언제 물어봐도 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되고 보자는 생각은 했다. 앞이 안 보이는 일일수록 그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면 공부가 필수였다.


지금 회사에서 주요하게 보는 이슈가 무엇이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한가. 그 사람들이 이 이슈를 보는 입장은 어떤가, 왜 그런 입장인가에 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찍 오거나, 저녁 늦게까지 야근하면서 시간을 내기는 힘들 때가 많았다. 특히나 저녁 늦게까지 아이를 찾아가지 않으면 봐주시는 시어머니보다 당시만 해도 같이 살고 있던 시누이의 눈총이 더 따가웠다.


공부를 하기에는 조용하고 방해가 없는 점심시간이 제일 좋았다. 일 때문에 손님을 만나는 약속이 없으면 점심시간엔 김밥을 먹으면서 무조건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소스는 신문부터 내부 보고서, 리포트, 회의 시간에 주워들은 얘기들, Archive에 보관돼 있던 접근 가능한 옛날 자료, 웹서치를 통해 찾은 WHO(세계보건기구) 등에서 발행한 자료들이었다.


예전 수능공부할 때 했던 방식대로, 노트를 만들고 손으로 쓰면서 정리해 나갔다. 다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한 달 정도 집중해서 공부를 하고 났더니 담배산업과 관련된 이슈는 큰 틀에서 몇 가지로 정리되었고, 그 각각의 카테고리에서 중요도와 긴급성에 따라 이슈를 더 세분화해서 분류해 정리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직속상사에게 질문도 했고, 자료가 있는지도 물어봤다. 본인이 아는 한에서는 답변을 해주었지만,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부분들은 남아 있었다.


두 번째로는 사람들을 만나러 "본격적으로" 돌아다니기로 했다. 첫 6개월 동안도 협회에 나가 인사를 하고, 담당 공무원도 만나러 가고, 국회도 드나들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만남이라고 말하는 것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꼭 만나야 할 사람부터 만나기로 했다는 말이다.

돌아다니기 전에 만나야 하는 사람들을 리스트업 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먼저였다. 어떤 사람을 만나는데 먼저 시간을 쏟아야 할지 우선순위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작정 찾아가기보다, 혹시 나와 그 사람들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는지 리서치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만 이 사람들은 왜 나에게 시간을 내줘야 하는 건지에 대한 생각 했다.


한국은 정말 한 다리 건너면 다 안다고 했던가. 학연, 지연, 혈연을 타파해야 한다고 부르짖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런 갖가지 '연'에 의지해야 할 순간이 일을 하면 할수록 더 많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만나야 할 사람들이 정해지자, 그들에게 닿는 최대한 효과적인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바로 대차게 헤매었던 기간 6개월의 위력이 발휘됐다. 놀랍게도 그 첫 6개월간 맺은 인연들이 내가 정작 필요한 분들을 만나는 데는 큰 도움이 됐다. 그 인연들 중 누군가가 전화만 한통 해주면 그냥은 만나주지 않던 사람들도 시간을 내주었다.


물론 그 첫 6개월간 그 사람들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만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신경 썼던 것은 '놀더라도' 내가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곳에 가서 '놀았다'. 월급 받는 직장인이 '논다'라고 표현해도 될지 조심스러워 다시 얘기하면 그 사람들의 생활공간으로 들어가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저녁을 곁들여 소주를 한잔 하거나, 같이 골프를 치거나 하는 전통적인 관계 형성의 방법은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외국계 회사라, 규정은 엄격했고, 아이가 픽업을 기다리고 있던 엄마였기 때문에 퇴근 후 회식조차 자주 하기 힘든 처지였다.


대신 내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일과 시간 중 매일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점심시간마다, 국회 대강당에서 요가 수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강사분을 찾아내고, 요가반의 총무를 찾아가 혹시 국회 직원이 아니라도 요가 수업에 참석 가능한지 문의했다. 이미 요가는 진심으로 수련하고 있던 참이었기도 했다. 몇 차례 거절당했지만 진심으로 수 차례 요청한 끝에 나의 끈기에 진(져 준) 요가반 총무님의 배려로 조용히 구석에서 수련만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허락을 받았다.


점심시간마다 국회로 갔다. 국회 본청 태권도장에서 수련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요가반 회원들과 직원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먹으면서 친분이 쌓이니, 또 자연스럽게 "우리 방에 가서 차 한잔하고 가요" 해서 따라가서 믹스 커피도 얻어 마시고, 그 의원실 모든 비서관 보좌관들과 인사도 하게 됐다.


요가반 회원들은 주로 여성 비서분들이었다. 그분들의 급수는 보좌관 비서관들보다 낮았지만 내가 당시에 보기엔 그들이 속한 '방'에서의 진정한 실세는 '여비서'로 불리는 그분들이었다. 이 분들이 영수증 처리, 예산관리, 지역구 관리 등에 필요한 모든 행정적인 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그 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

요가와, 식당밥과, 믹스커피를 나누면서 친분이 쌓이자 빠꼼이인 이 언니들은 내게 필요한 것이 없는지 도리어 물어봐주기 시작했다.


국회 비서경력 15-20년인 이 분들은 본인들이 속한 방뿐만 아니라, 다른 방까지, 초당적으로 네트워크가 연결돼 있다. 연결, 연결, 또 연결돼 있는 그 거미줄 네트워크의 힘을 빌려 중요한 상임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의 사무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나자, 필요한 상임위원회의 웬만한 방에는 그냥 쑥 찾아가도 될 만큼의 채널이 생겼다.


아주 아주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에 이미 나는 국회에서 참 재밌는 이유로 '유명'한 대관담당자였다. 유일무이한 30대 여성이라는 것만으로도 튀는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는 다들 말도 안 된다고 했던 그것이 오히려 나를 각인시키는, 엄청나게 유리하게 작용한 요소였다.

우선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국회 요가 클래스에 들어가서 나의 엄청난 우군이 되어주었던 비서 '언니'들을 만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중에는 1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진짜 언니가 된 분들도 있다. 그만큼 든든한 우군들이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매일 국회의원실을 드나드는 수십 명의 대관담당자들 사이에서 원피스에 재킷을 차려입고, 힐을 신고 핸드백에서 자연스럽게 회사 제품(담배) 꺼내 들고 보여주면서 두꺼운 자료와 함께 설명하는 사람이 나였다. 심지어 흡연자도 아닌데, 나중에는 흡연자보다 더 자세히 제품에 관한 이슈를 술술 설명할 수 있었다.


또 초반에는 "아무것도 해달라는 것 없이 그냥 왔다가 가는 사람'으로 유명했다고 했다. 뭔가 부탁을 할 것 같은데 아무 말 없이 왔다가 차만 마시고 간다고. 기다리다 못해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묻게 되었다고.

대관담당자들이 필요할 때 찾아와서 어떻게 해달라는 민원을 들은 적은 많지만, 도리어 필요한 것이 없냐고 되물어본 것도 처음이라고.

그렇게 6개월이 지나자 처음 찾아간 국회의원실에서도 나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는 말까지 듣게 됐다. "아~~ oo 회사 그분이시구나"


또 하나 큰 도움이 됐던 방법은 그때까지는 활용할 생각조차 못했던 '대내외적인 학연'을 활용한 것이었다. 왜 굳이 '대내외적'이냐 하면, '내적'인 인맥의 시작이 바로 한 집에 살고 있었다는 데 있다(!) 바로 남편이었다. 같은 학교 출신에, 사람을 좋아해 인맥이 넓었던 남편은 잘하고 칭찬만 받던 커뮤니케이션 일을 하다가 갑자기 대관담당자가 되어 구박받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더니, 고맙게도 적극 도와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나보다 학번이 높고, 학교 다닐 때도 학생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던 덕분인지 얼마 안 가서 남편의 도움을 받아 학교에서 아무리 해도 마주칠 일이 없던 저 윗기수의 학교 선배님들 중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외적'으로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같은 학과의 동기들이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덕에 주위에 한창 언론인 생활을 하는 동기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국회나 행정부를 출입하는 기자 친구들도 있었다. 대학 동기로, 아무런 조건이 없이 만나 웃고 떠들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맨몸으로 시베리아 벌판을 헤매고 있는 나를 보고서는 정부출입기자를 하던 몇몇이 나서 가장 잘 도와줄 사람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이 대관을 시작하고 6개월간 집중적으로 일어난 일들이었다.

이런 도움들이 있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던 내 대관담당자로서의 커리어가 그 뒤로도 쭉 이어질 수 있었다. 이때 만난 사람들 중에는 내가 미국에 오고 나서도 연락을 하는 인연도 있다. 일로 만났지만, 이렇게 십수 년 넘게 귀하게 남은 인연도 있으니, 비록 하루하루가 전쟁터였으나 사라지지 않은 값진 경험이었다.


물론...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대놓고 갑질을 하는 '갑'들도 많았다. 지역구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대관담당자들에게 부탁하거나 (꼭 해줘야 한다는 '말'과 함께), 취직 부탁(아주 강한) 받는 경우도 있었다. 국회를 보따리상처럼 이방 저방 돌아다니다 보면, 보통은 방문자를 반기지만, 어떤 방은 대놓고 문전박대를 했다. 시간 없으니 가라는 말이 그때는 얼마나 서러웠던지...


보건복지 쪽 종사자들 같은 경우는 담배회사 직원을 괴물 보듯 하는 분들도 있었다. 입밖에 차마 내지는 않았지만 "악의 축에 기대어 밥벌이를 하는 것들은 상대하지 않겠다"는 태도와 시선이 너무나 분명했다. 욕받이 생활을 많이 해봤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또 다른 종류의 욕받이였다.

우선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고, 어찌 저찌해서 만나더라도 다음에 또 만나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같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다섯 번쯤 찾아가고 나서야 겨우 만났던 적도 있다.

삼고초려가 아니라 오고 초려였다.

어쩌다 미팅이 성사되어도 대놓고 적대적인 사람 앞에서 기죽지 않고 회사의 입장을 전달하기란 만만치 않았다.


어렵게 만났으니, 첫 미팅을 잘해서 다음에도 이 사람이 내게 시간을 내 줄 이유를 찾아야 했다.

첫 미팅을 마치고 나오면, 이 사람이 나를 다시 만나야 하는 이유는 무얼까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하게 됐다. 그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첫 6개월 동안 이슈를 공부할 때 썼던 노트가 큰 도움이 됐다.


작가의 이전글기회는 운, 살리는 건 노력 II-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