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되면 그게 더 이상함
미국으로 오고 나서 가장 맘에 드는 점 중 하나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골프장이 많다는 것이다. 집에서 10-15 분 거리에도 3-4 개의 코스가 있고 한 시간 정도 안쪽에서 찾자면 초이스가 더 많아진다.
겨울에도 한국 늦가을 정도의 온도라 연중 라운딩이 가능하고, 가격도 코로나 전에 비해 많이 올랐다고는 하나 한국에 비해서는 싼 편이다. 잘 찾으면 주중 주말 모두 10만 원 내외로 18홀 라운딩이 가능하다.
골프는 좋아했지만 한국의 워킹맘 생활에서 골프를 취미로 갖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시간도 없고 가격도 비싸, 그 취미를 꾸준히 즐기기엔 녹록지가 않았다.
골프천국이라는 미국에 오니 물 만난 고기였다.
매일 연습장에 가고 일주일에 세 번씩 라운딩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좋은 매개가 되기도 했다.
내가 왜 이렇게 골프를 좋아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여유도 생겼다. 요즘 젊은 여성골퍼들처럼 예쁜 옷을 입고 인스타에 올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일하기 위해 활용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매력적인가.
삼성그룹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님이 남긴 유명한 말 "골프와 자식은 내 맘대로 안된다"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 제일, 아니 세계적인 그룹의 창업주도 맘대로 안 되는 것이 두 가지나 있었다니 그것도 놀라운데, 어쩌면 이렇게 찰떡같이 비유를 해 놓으셨는지..
난 그 두 가지에 '인생'까지 하나 덧붙이고 싶다.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라고 했던가.
'골프의 결과는 장갑을 벗어봐야(18홀을 다 쳐봐야) 안다'는 말과도 참 닮아 있다.
그래서 내가 골프를 좋아하나 보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할 수 있는 인생처럼 반전과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다.
한 번의 골프 게임에 18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이 가장 맘에 든다. 그리고 18홀을 다 치기 전까지는 그 게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도. 게임을 끝내려면 아무리 맘에 안 들고, 아무리 재미가 없어도 최선을 다해 마지막 홀인 18번 홀에서 아웃할 때까지 쳐야 한다.
물론 그 18번의 기회를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도 나 스스로의 마인드 컨트롤이기는 하다. 18홀을 치다 보면 위기가 닥치는 홀이 꼭 나오기 마련인데, 그 홀을 어떻게든 '덜 망치게' 끝내고(골퍼들은 'Save'했다. 또는 '막았다'라고 표현한다) 그 홀의 기억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 다음 홀로 이동해야 한다. 이전 홀에서 망친 플레이에 계속 맘을 두면 다음 홀에서 주어진 기회조차 살리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인생도 똑 닮았다. 일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항상 '똥 밟았다'싶은 순간이 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서 똥 밟은 그 순간을 돌파하여, 최대한 빨리 지나친 다음 '쨍하고 해 뜰 날'을 기다려야 한다. 한번 태어나면 그렇게 살다가 육신의 허물(장갑)을 벗는 그 순간까지 살아내야 하는 것도 골프와 닮은 인생의 모습이다.
또 하나 재밌는 점은 언뜻 보면 개인 스포츠인 것처럼 보이지만, 같이 플레이하는 팀 멤버의 영향을 매우 예민하게 받는 게임이라는 점이다.
4명이 한 조가 되어 같이 플레이하기는 하지만, 결국에 스코어 카드에 적히는 점수는 그 사람 개인의 점수이다. 친선게임에서는 조를 짜서 팀전 형식을 도입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다른 사람과의 협업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에 이겨야 하는 '철저하게' 고독한 게임이 바로 골프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점은 그 고독한 나만의 게임에서 바로 옆에 그들만의 고독한 게임을 하고 있는 다른 플레이어 3명이 있다는 점이다. 4명이서 페이스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플레이를 도저히 보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나와 구력이 비슷하거나, 신체 조건이 비슷한 멤버가 있으면 잘 치든 못 치든 그 분위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인생도 그렇다. 원래 인생은 '독고다이('혼자서 일을 처리함'라는 말의 일본어에서 유래됨) 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혼자지만 또 혼자가 아니다.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가족, 친구, 직장동료, 선배, 후배들이 서로의 영향 속에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좋은 골프멤버를 만나면 그날은 플레이가 쉽고 잘 풀리기도 한다.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거나, 말 그대로 '케미'가 맞지 않는 멤버를 만나면 그날의 플레이는 꽝이다. 딱 그렇게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 전환점을 맞게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엉망이 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내 플레이를 망칠 수도 있는 동반자들의 '구찌(집중력을 흩트리는 심리전의 일종으로,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하는 코멘트)'를 뚫고 집중해야 하는 하는 점은 사회생활과 닮았다. 여러 사람의 망치고 싶은 마음을 뚫고 내 길을 걸어가야 하는 거니까.
일단 채를 들었으면 공이 맞든 안 맞든 자신 있게 휘둘러야 한다는 점도 재미있다. 마음이 불편하거나, 자신이 없으면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 샷은 무조건 삑사리가 난다. 맘 속으로 "저 벙커를 피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자신감이 없어지고 신기하게도 공은 벙커로 빨려 들어간다.
다른 스포츠도 마찬가지겠지만 골프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 즉 자신감이 플레이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감을 가장 많이 떨어뜨릴 수 있는 요소가 너무나 많은 스포츠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록 정적으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도전이 많은 운동이다.
오죽하면 '골프가 안 맞는 데는 108가지 이유'가 있다고들 할까.
찾다 찾다 못 찾으면 '109번째 이유'도 있는데, '그냥 안 맞는' 날도 있다고 말하는 플레이어들의 자조 섞인 말도 심심찮게 들었다. 골프 한 게임을 인생의 108 번뇌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인생과 닮았다. 연습을 많이 한다고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프로 선수라고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불운으로 다 잡은 우승을 놓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계속 지고 있다가도 갑자기 샷이 잘 맞아 우승하는 경우도 많다. 언제 반전을 거듭해서 홀인원(파 3 홀에서 한 번에 홀에 공을 넣는 경우)이 나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도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인 것과 똑 닮았다.
오늘 플레이가 잘 안 됐어도, 다음번 플레이는 잘 치고 싶다고 기대하는 것도 인생의 복사판이다.
비록 오늘은 똥을 밟았더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희망과 기대로 또 살아가는 게 인생이니까.
물론 노력 없이 요행만 바래서는 실망의 크기도 더 커진다는 점도 골프와 인생이 닮은 점이다.
확률게임이기는 하지만, 노력할수록 그래도 좋은 실력을 가질 확률이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도 퇴근 후 연습장으로 간다.
푸시킨 시인이 ”비록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고 한 것처럼 비록 골프가 잘 안 맞더라도 화내거나 실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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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역시나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인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