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가벼워지자
한참 전에 써두었던 글을 다시 '발굴' 했다.
전형적인 K 장녀로 50년 가까이 살다가 미국에 온 직후 써두었던 글이다. 나를 비롯해 지금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K 장녀들이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벼워지자, 행복해지자, K 장녀들이여. You deserve it!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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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조금은 충격적인 뉴스를 보게 되었다. 외교부 국장이었던 김 아무개가 2018년 대통령 순방을 수행하다가, 싱가포르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상적인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한 상태로 아직 회복 중인데, 휴직기간이 끝나 면직이 되어 더 이상 공무원 신분이 아니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김 아무개 국장은 쓰러지기 얼마 전, 외교부 내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양자외교를 담당하는 지역국의 국장 자리에 올랐고, 외교관인 남편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도 사회생활도 “승승장구”하여 주목받던 외교관이었다고 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어떤 친구가 생각났다. 내 친한 친구의 직장 동료였고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일하며 아이 둘을 키우던 40대 초반의 워킹맘이었다. 친정에서는 장녀로, 시댁에서는 맏며느리로, 법원에서는 부장판사 승진을 앞둔 참이었다.
엄청난 업무량에, 아이 둘을 키우며 시댁제사까지 꼬박꼬박 챙기면서 며느리 노릇까지 열심히 하던 당시 동갑내기 친구는 월요일 새벽에 화장실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쓰러지기 이틀 전 토요일까지 근무를 하고, 일요일 오전에 친정 부모에게 갔다가, 오후에는 시댁에서 시아버지 제사에 참석했다. 월요일 새벽에 쓰러진 후, 남편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몇 시간이나 쓰러져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 뒤로 일어나지 못했다고… 충격받은 표정으로 얘기를 전하던 친구의 얼굴이 아직도 떠오른다.
이 두 사람 얘기를 듣고 내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얼마나 열심히 힘들게 버텨왔을까”였다.
아마도 그들은 본인들에게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최선을 다해서 해 내려고 모든 힘을 모든 노력을 쏟았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해서 사시와 외시를 패스하며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했을 것이고, 결혼도 사회적인 기대에 맞는 사람과 했을 것이고(누가 봐도 “맞는” 짝이라고 얘기하는) 결혼 후에는 일하면서 임신하고 출산하여 그 아이를 돌보는데 또 온 힘을 다했을 것이다.
너무나 알아서 모든 일을 척척 하다 보니, 주위 사람들은 이들이 얼마나 힘든지 잘 모른다. 또 이런 사람들일수록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주위에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해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힘들다는 것을 주위에서 알아채는 건 더 힘들다.
오죽하면 “K-장녀”, “큰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싶다.
본인은 과부하로 쓰러질 만큼 일하고 있지만, 더욱 심각하게도 그 같은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로 계속 더 더 더 일하다가 결국 쓰러지는 것이다.
이 둘의 이야기를 듣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멈추기를 잘했다” 는 것이었다.
나는 전형적인 K장녀다. 어릴 때부터 늘 K 장녀에게 주어지는 전형적인 기대와 주목을 받으며 자랐다. 공부를 꽤 잘했고, 각종 대회에 나가 상도 꽤 자주 받아오던 나를 부모님은 늘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을 언제나 알게 모르게 더 챙기시던 부모님이 내가 학교에서 상을 받을 때마다 (그렇게 하지 못하던 동생보다 나를 더) 자랑스러워하시니 나도 기뻤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항상 부담감을 안고 살았다. 계속 잘해야 했고, 계속 부모님의 자랑이 되어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부담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던 남동생이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남동생은 남동생대로 성격 세고 모든 것을 본인보다 '잘' 하는 누나와 항상 비교되는 고충이 있었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취직도 결혼도 출산도 취직도 집안단속도 모두 힘들다는 내색 없이 “척척” 해내는 내게 부모님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의논하셨지만, 즐겁거나 기쁜 일은 남동생과 나누는 것이 먼저였다. 한 번은 왜 그러시는지 직접적으로 여쭤본 적도 있었는데, “니는 알아서 잘하잖아. 니 동생은 아직 앞가림을 못한다”라는 이해하기 힘든 대답이 돌아왔다.
참고로 내 동생은 나보다 두 살 연하이고 서울의 멀쩡한 명문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니고, 결혼하여 아들도 하나 있다. 도대체 뭘 앞가림을 못한다는 건지 도저히 지금까지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차이점이라면, 나는 친정에 힘든 일이 있어도 말을 잘 안 하는 것에 비해 남동생은 미주알고주알 힘든 티를 냈다는 것이다. 눈치가 없는 건지 모자라는 건지, 결혼한 후에는 올케와 싸운 얘기까지 시시콜콜 부모님께 얘기하기도 했다. 나라고 힘든 일이 없었을까마는, 부모님께 말씀드려도 속상해만 하실 뿐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안 되는 걸 왜 굳이 얘기하나 싶은 심정이었다.
안 그래도 남아선호사상이 있던 집안에 남동생은 점점 더 막내처럼, 나는 점점 더 장녀처럼 포지셔닝이 되었고, 고착화되어 시멘트처럼 굳어버렸다.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나의 K장녀 노릇도 자연스럽게 변화가 찾아왔다. 물리적인 거리가 있다 보니 예전보다는 해야 할 “K장녀노릇”이 많이 줄었다. 말 그대로 할 수가 없으니까..
대학졸업 후 24년간 이어져오던 직장생활도 한 템포 쉬게 되니, 사회생활과 가족과의 관계도 모두 달라졌다. 아예 기대가 사라졌달까? 묘한 자유로움과 가벼움이 느껴진다.
언제까지 이 쉼이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나는 저 두 분처럼 아등바등하다가 죽기는 싫다는 거다. 너무 불쌍하고 억울한 인생이다. 왜 남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살고, 내가 그렇게 산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무리하게 살다가 쓰러져야 하는지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살면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겠지.. 잠시 멈추고 심호흡하면서 생각해 보자.. K 장녀노릇은 이제 그만.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도 이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