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는 자세
10여 년간 근무하던 담배회사를 뒤로 하고, 1년여의 노력 끝에 이직한 회사는 술회사였다. 정확하게는 스카치위스키를 수입하여 판매하는 세계적인 기업의 현지 법인이었다.
무슨 놈의 팔자가 무기, 담배, 위스키... 뭐 이런 '험한' 곳만 찾아다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커뮤니케이션을 총괄하는 자리였지만 마케팅 부서 소속 포지션이었다.
직속상사와 차상위 상사 모두 한국 사람이 아니었고, 처음에는 마케팅 안에 커뮤니케이션 부서가 소속된 것이 좀 새로웠다. 하지만 브랜드가 중요한 회사이니 만큼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위주였고 또 그렇게 따지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전임자는 그 자리에 20년을 다닌 분이었는데, 인수인계라고 딱히 받은 것이 없었다.
폴더는 비어있었고, 인수인계 내용도 우리나라의 위스키 산업의 역사 같은 개괄적인 것 말고는 없었다. 내일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주로 어떤 내용으로 보고해야 할지와 같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맨땅에 맨땅이었다.
그래도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일 자체는 늘 해오던 일이어서 그런지 맨땅에 헤딩도 할만하다 싶었다. 더구나 그런 상황을 나만 아는 건 아닌 것 같았고, 워낙 업무진행이 안 돼서 타의에 의해 회사를 나가는 전임자를 두었다는 건 어쩌면 후임자인 내게는 유리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
'기대가 워낙 없으니, 조금만 해도 많이 잘해 보이는 효과가 나잖아?'라고 애써 위로하면서 첫날을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조금 적응이 되기 시작하자, 고유 업무가 아닌데도 다른 부서에서 골칫덩이로 여기던 일이나, 진행이 안 돼서 멈춰져 있던 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텃세라고 하기엔 좀 웃기지만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하기 싫었던 일 또는 경계가 애매한 일을 떠넘기는... 그런 게 분명히 있었다. 모든 회사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내 방식대로 하기 시작했다. 하다 하다 나중에는 외부 손님들을 회사 공간에 초대하여, 세일즈를 일으키는 일종의 영업이라고 할 수 있는 일까지도 맡겨졌다.
이왕 해야 할 것이라면 최대한 그 '기회'를 활용하기로 했다. 밖에서 만날 사람들을 회사의 그 공간으로 초대하여 회사 브랜드를 알리기 시작했다. 전혀 매출이 없던 곳에서 한 병이라도 팔리게 되니, 말하자면 한 병만 매출이 나도 100% 신장이었다. 처음 해 본 일이었지만, 매출이 날 때마다 신도 났다.
정신없이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다 하다가 1년 반이 후다닥 지나가버렸다.
입사한 지 1년 반 정도가 지난 2017년 11월 말의 어느 아침, 내 자리로는 잘 오지 않던 사장님이 갑자기 내 자리로 와서 "Can I talk to you for 5 min? (5분만 얘기 나눌 수 있을까?)라고 말하고, 회의실로 이끌었다. 직속상사인 마케팅 디렉터와 법인장(사장)에게 각각 50%씩 보고했었고, 1:1 미팅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날은 보통날과는 좀 표정이 달랐다. 뭔가 조금 상기된 표정? 이 읽혔다.
그날은 거의 10년이 다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서 그날 무슨 옷을 입었는지, 사장님이 어떤 머플러를 맸는지, 회의실의 공기가 어땠는지가 다 기억이 난다.
그 자리에서 놀랍고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다. 지금 HR Director (인사부 총괄 전무) 자리가 비었는데, 그 자리를 해보면 어떠겠냐고 했다.
나의 처음 반응은 "You must be crazy(미쳤구나)"였다.
인사부는 전혀 안 해봤을뿐더러,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것도 인사부를 총괄하는 임원 자리라니 말 그대로 이 사람이 미쳤구나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뭔가 이유가 있으니 저러지 싶었다.
그 자리에서 사장님은 나를 정말 정성스럽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꼭 물건을 팔려고 하는 영업사원처럼 그 자리를 내가 맡아주기를 간절히 세일즈하고 있었다.
몇 가지 이유를 대면서, 회사에서는(본인이) 내가 꼭 필요하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가장 먼저 얘기한, 그래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뢰'였다. "나는 한국말도 모르고, 한국 문화도 모르지만, 한국인이 대부분인 회사를 경영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너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도와줬으면 한다. 그동안의 업무성과를 봤을 때 너는 충분히 배울 수 있고, 나도 매니저로서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겠다. 우리 한번 같이 해보자"가 메시지였다.
30분에 걸친 열띤 세일즈를 마무리하면서 그는 "지금 급히 대답할 필요 없다. 이번 주에 중국 출장을 다녀올 테니 다음 주에 얘기해 달라"라고 하면서 갑작스러운 제안에 내가 놀랐을까 봐 걱정해 주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열정적인 모습과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있고, 너보다 적임자는 없으니 나를 따르라"는 리더십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굳이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가시밭길, 자갈길이 뻔한 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성과가 제일 중요한 여느 외국계 회사와는 달리 정치와 공작과 모략이 난무하는 회사의 문화를 바꿔야겠다는 미션을 가지고 한국에 온 사장이었다. 회사를 '때려' 바꾸고 싶은데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되어야 할 HR Director를 믿지 못해 1년 사이에 두 명이나 내보낸 전력이 있던 분이었다.
그날은 우선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미팅을 끝냈다. 대답은 생각해 보겠노라고 했지만, 돌아서서 회의실을 나오던 내 맘속에는 '까짓 거 뭐, 한번 해보지. 아님 말고' 하는 그 불치병이 이미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그날 직속상사의 조언을 구하면서 또 하나 놀랐던 점이 있었다.
내가 만약 제안된 그 자리를 수락하면 당시의 직속 상사였던 사람과 같은 직급의 동료가 될 뿐 아니라, 그 직속상사가 운영하던 부서가 쪼그라드는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그 사람이 반대하면 이 일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직속상사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니 덕분에 내 팀이 쪼그라들겠네 ㅋㅋㅋ" 특유의 농담을 던지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처음 사장님이 그 아이디어에 대해 논의했을 때도 두 손들어 환영하면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최선을 다해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정말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추후에 내가 그 제안을 수락하여 동료가 되었을 때에도, 전혀 이전 상사같이 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동료로서 counterpart 로서 나를 존중해 주고 지지해 주었다.
사장님의 강력한 추천과 직속상사의 지원으로 나는 커리어상 세 번째 기회이자 위기상황으로 다시 나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급여도 파격적으로 인상되었고, 중간 관리자에서 경영진으로 내부 직급상 두 단계 승진하면서, 회사 창사이래 최초라는 여러 타이틀의 주인공이 됐다.
회사 내부에서 경영진으로 승진하는 케이스도 처음이었고, 두 단계를 건너뛴 승진도 처음이었다고 했다. 여성으로서도 최초의 케이스였다. 당시만 해도 외국계이지만 매우 보수적인 한국회사의 문화를 가지고 있던 회사 사람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인사였고, 그만큼 "어디 한번 잘하나 두고 보자"하는 시선과 뒷말도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