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용기 그리고 노력
아주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전무후무하게도 HR을 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긴 데는 참 시사적인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HR Director를 일 년 새 두 명이나 내보내고 나서 사장님은 스스로 인사 전무 대행을 하면서 후보자를 찾고 있었단다. 외부 헤드헌터에서 추천한 몇몇을 인터뷰해 보았으나, 딱히 맘에 드는 사람이 없었고, 사람이란 것이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싶어 쉽게 낙점을 못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모르는 사람을 인터뷰만 보고 들이기엔 이미 두 번의 실패를 겪었던 이후라 내부로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다 내가 눈에 들어왔다고.
회사 내부가 늘 정리가 되어있지 않고 엉망진창인 와중에 내가 맨땅에 헤딩하는 모습을 일 년 정도 봤던지라, 저 사람이라면 어쩌면 할 수도 있겠다고 속으로 생각만 했었다고 한다. 아무리 미친(좋은 말로 창의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CEO 라 할지라도 인사 경험이 없던 나에게 그 중책을 맡긴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어서 생각만 하고 있다가, 본사의 인사 담당 Vice President를 맡고 있던 분(이 인사전무 포지션의 상관이기도 하다)과 통화를 하면서 상의했다고 했다.
그 통화에서 HR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한국 법인의 HR을 맡기면 어떻겠냐고, 그렇지만 전혀 그 분야에서는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고... 본인의 염려사항을 상담하는 사장님에게 이 VP 분은 딱 세 가지를 질문했다고 한다.
그분도 나를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회사에 들어온 지 1년 정도가 조금 지난 시점이었고, 본사의 레이더에 올라갈 만큼 높은 직급도 아니었다. 사람을 모르는 상태에서 HR 경력 수십 년의 이 노련한 분이 던진 세 가지 질문은 아래와 같았다고.
1. Do you trust her? (믿을 수 있어?)
2. Is she courageous, in your view?(네가 보기에 용감한 것 같아?)
3. Is she smart? (똑똑해?)
이 세 질문에 대한 사장님의 대답은 Yes였고, 그 대답을 듣고 나서 VP 분은 "Why do you hesitate? Go ahead!(뭘 망설이니? 니 생각대로 해) 였다고 들었다. 이 이야기는 그 이후에 그 두 분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 수 차례나 반복되어 결국 내 귀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그때 그 질문을 던지고 상담해 줬던 VP는 일을 시작하면서 functional manager (외국계 회사에서 직속상관 이외에도 각 부서별로 조직이 따로 되어 있고, HR 조직으로 봤을 때 상사가 따로 있다)로서 같이 일을 하게 됐다. 나처럼 다른 일을 하다가 15년 만에 HR로 전환한 HR 경력 25년에 총 40년 경력의 노련한 인사전문가였다.
같이 일하는 동안 해 주셨던 그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참 주옥같았다. 국적이 달랐고, 그분도 나도 영어가 제2 외국어였던 탓에 그분의 경력과 조언을 100% 이해하지 못할까 봐 안타까울 정도였다.
나중에 그분으로부터 직접 왜 그 세 가지 질문을 했는지 그 질문만으로 어떻게 나에 대한 확신을 가졌는지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
믿을 수 있냐고 물었던 이유는 같이 무슨 일을 도모하려면 상호신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데리고 뭔가 변화나 혁신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결국 믿는 사람들끼리의 팀워크가 단단해야만 무엇이든 도모해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질문이라고 했다.
용기에 관한 질문은 이 분의 경험에서 나온 개인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그 조직의 장이라면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데, 항상 맘이 편한 의사결정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위험요소가 있더라도 감내하고 책임질 용기가 있어야만 시의적절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세 번째 질문은 듣고 보니 회사에서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똑똑한 사람이냐고 묻는 것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분야를 시작하면 많이 배워야 할 텐데,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빨리 익힐 수 있는 사람이냐는 말이었다.
종합하면, 빨리 배우는 사람이 새로운 분야에 부딪힐 용기가 있고, 상호 신뢰가 있는 팀원이나 사람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성공할 확률이 크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질문과 조언이었다.
그 이후 일을 하면서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특히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 조직에서 꼭 필요한 인재가 갖추어야 할 필수요소가 맞았다. 그냥 일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조직에는 이런 사람들이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만약 대대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곳이라면 믿을 수 있고, 용감하며 빨리 습득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수였다.
어찌 저찌하여 전혀 몰랐던 분야로 일을 확장하면서, 내가 원래 맡아하던 부서까지 마케팅에서 인사부로 옮겨오게 되었다. 원래 하던 일(커뮤니케이션, 대외협력)의 후임자를 찾아서 그 업무에 대한 보고를 받으면서, 기존의 인사팀으로부터도 보고를 받았다.
지난 1년 동안 두 번이나 리더십이 바뀐 탓에 특히 인사부서의 사기는 정말 엉망이었다. 다른 부서에서도, 직원들로부터도 쥐어 박히기 일쑤였고(진짜 쥐어 박힌 것은 아니다) 걸핏하면 타깃이 되어 왔던 인사 부서의 전 직원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거나, 다른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 첫날부터 느껴졌다.
HR 실무경력 15년의 팀장이 있었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뿐더러, 팀 전체가 터프한 직원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있었다.
전혀 해보지 못했던 일에, 사기가 바닥인 팀을 맡기로 결심하면서 첫 6개월간 목표로 삼았던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사장님을 비롯한 Management의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전임자 2명이 신뢰를 주지 못해 1년 만에 자리를 내놓았다. 처음에 신뢰를 얻을 수 없다면 아무것도 도모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둘째, 업무 외에 시간을 투자하더라도, 실무와 그에 관련된 이슈를 습득하는 것이었다.
직접 실무를 하지 않는다고는 하나, 내용을 디테일하게 알지 못하면 직원들에게 업무지시를 하거나, 요청사항을 얘기할 때 매우 곤란하다. 실무에 대해 이해가 없고서는 아랫 직원들의 신뢰를 얻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고, 내게 있어서 기존 HR 직원들의 신뢰와 팀워크는 매우 중요한 가치였다.
셋째, 조력을 해줄 사람들을 찾아서 6개월간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움을 청할 것.
첫 6개월은 아무리 바보 같은 엉뚱한 질문을 해도 용서되는 기간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모르는 분야에 새로 도전을 하게 '만들었으니' 회사의 책임도 있고, 내 질문에 답을 잘해줄 의무가 있다고 (혼자) 생각했다. 처음부터 오랫동안 해 온 것처럼 잘하기를 바라진 않겠지 하는 맘도 있었다. 원래도 모르면 수줍어하지 않고 잘 물어보는 성격이었는데, 그런 상황까지 되고 보니 질문이 쏟아졌다.
이 시기에 내가 도움을 청했던 사람은 다양했다. 직속상사가 된 사장님부터 홍콩 아시아 본사에 있던 VP 분(내가 HR에 발을 들이게 한 책임을 져야 해!!), 전 상사였던 마케팅 디렉터에 심지어 커뮤니케이션을 하던 시절 잘 지내던 노동조합위원장까지 모르면 왜 그런지 묻고 또 물었다.
첫 6개월은 매일 야근을 해야 했다. 밤 10시가 넘어 아무도 없는 사무실이 처음엔 무섭다가도 이것만, 이것만 하다 보면 금방이었다. 저녁에는 야근을 했지만, 낮에는 사장님을 비롯한 사람들과의 미팅이 주요 일과였다.
인사부 직원들에게는 거의 매일 보고를 받았다. 말이 보고지 대부분 내 질문에 대답해 주는 시간이었다. 예상한 대로 디테일까지 모두 들여다보는 게 쉽지는 않았다.
순수한 HR 말고도, 노무 업무나, 총무업무까지 다 같이 하고 있던 부서였고, 최대한 자세히 알고자 하는 마음에 직원들을 여러 차례 귀찮게 했다. 고맙게도 직원들도, 상사도, 동료들도 (적어도 겉으로는) 귀찮아하지 않고 잘 대답을 해 주었다.
내 맘속으로 정한 6개월간 나는 맘껏 질문하는 자유(?)를 누렸고, 그 6개월의 기간 덕분에 나머지 5년을 잘 보낼 수 있었다.
그 전 직장에서 새로운 변화에 도전해 보고, 맨 땅에 헤딩을 몇 번 해본 것은 큰 경험이 됐다.
무엇을 하든 특히 모르는 분야에 도전할 때는 두 배, 세배의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이 더 크게 발휘될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첫 6개월이었다.
다시 말하면 만약 그런 노력을 쏟아부을 각오가 되어 있고, 조력자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어떤 변화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귀중한 경험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의 6년여간의 시간은 내 커리어상 최대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최대로 일을 치열하게 해야만 했던 시간이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그래서 반짝반짝 빛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몇 년이 지나자, 고생했던 기억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좋았던 기억만 새록새록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