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리고 두드려라.. 열릴 때까지.
미국에서 취업이 금방 될 줄 알았다.
사표를 멋지게(?) 던지고 미국행 비행기를 용감하게 탈 때만 해도 그랬다.
23년간 매일 써왔던 비즈니스 영어에도 자신 있었고,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만한 외국계 기업에서만 하나도 아닌 몇몇 분야(인사, 대관, 커뮤니케이션)에서 꾸준히 경력을 쌓아왔으니, 막연하지만 내가 맘만 먹으면 원하는 곳에 취직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완벽한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알고 보니 부끄럽게도 정말 근거가 없었다)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취업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로 맘먹고 나니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는 회사를 세 번이나 이직해본 경험은 있지만, 그곳은 적어도 내 '구역'이었다. 외국계 기업으로만 돌다 보니, 헤드헌터들 사이에서도 이미 이력서가 돌고 있던 상태였고 혹시 이 자리에 관심 있냐는 전화도 종종 받곤 했다. 적극적으로 이직을 준비할 때도 어디에 어떤 자리 정도면 적합하겠다와 같은 혼자만의 '감'이지만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구인 구직 시장과 그 마켓에서 내가 어느 정도 위치인가에 대한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 왔더니, 단지 12시간 비행기를 탔을 뿐인데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와 본 곳이었으니, 친구도, 학연도, 그 흔한 선배도 한 명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네 친구들과 학교선배들을 만났으나 그 사람들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었다. 내가 겪어온 경력과 많이 다를 뿐더러, 전공과 다른 여러가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누구도 속시원히 조언을 해줄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대체 이곳 미국 캘리포니아의 잡 마켓이 어떤지, 거기서 내 커리어로는 뭘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깜깜 막막했다. 안개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호수에 홀로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노 젓는 느낌?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답답한 맘에 뭐라도 시작해야겠다 싶어서, 링크드인과 구글서치를 해보기 시작했다.
살고 있는 동네를 중심으로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 (20-30km 이내)에 어떤 회사들이 있는지부터 무작정 구글창에서 검색했다. 링크드인이나 인디드처럼 한국에서는 아직은 사용이 덜 활발하다고 느낀 구인, 구직 커리어 사이트도 말 그대로 '구경'을 시작했다.
참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방법이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싶은 미약한 희망을 품고서.
몇 달간 구글과 링크드인, 인디드에 올라온 구인 공고와 회사들을 꾸준히 관찰하고 나니 대충 '감'이 오는 듯도 했다. 말 그대로 감일뿐 아무런 확신은 없어서 당시는 참 답답했지만, 나중에 일을 하게 되니, 그 감이라도 있었던 것이 다행이고, 과정이었다 싶었다.
확실히 땅덩이가 넓어서 그런지 출퇴근 가능한 거리에 있는 절대적인 회사의 숫자가 매우 적었다. 취직 후 내내 일을 했던 서울과 비교하면, 회사의 갯수나 규모에도 확실히 한계가 있었다.
구인공고들을 읽어보다 보니 한국보다는 일이 세분화되어 있음도 확실히 느껴졌다.
인사 업무만 해도 급여주는 일, 직원 복지만 다루는 일, 대직원 관계 (Employee communication), 대 노조 관계, 채용만 하는 일 등으로 매우 세분화되어 있었다.
또 하나 느낀 점은 직군이 세분화된 만큼 구체적인 'Skill(기술)'중심의 역량에 집중되어 사람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다녔던 회사도 중요했지만, 그 회사에서 실질적으로 어떤 시스템을 직접 다루어봤고, 실무에 얼마나 자세히 관여했는지도 중요하게 보고 있었다. 인적 구성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는 한국보다는 시스템을 갖추고, 그 시스템의 좁은 한 부분을 익숙하게 굴리는 사람에 대한 수요가 많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필요한 기술이 있고, 근무 가능하다면, 장소가 어디인지는 구애받지 않다 보니 재택근무나 부분 재택근무도 아직은 한국보다는 흔한 편이었다. 워낙 땅덩이가 넓고, 출퇴근 가능한 조건으로 사람을 찾다 보면 한계가 있으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일단 일차로 파악이 끝나고 나자, 닥치는 대로 지원해 보기 시작했다.
영문 이력서는 이미 있었고, 링크드인과 인디드도 어카운트는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해보자 싶어 키워드를 걸어두고 하루에 10-20군데씩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일 한 두 달쯤 했으니 400-500 군데쯤 지원을 했는데도 단 한 군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자동 회신 이메일 (지원해 줘서 고맙지만 다음 기회에...)만 이메일 인박스에 쌓일 뿐이었다.
짜증과 답답함 그 중간쯤의 기분으로 '대체 왜?' 연락이 안 오는 거지? 를 생각하다가 혹시 이력서가 미국스타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뭐든 첫 인상이 중요하니 일단 서류 심사를 통과해야 그 다음 기회가 생긴다.
또 내가 하던 일이 너무나 '한국 시장'에 특화된 일이라 여기서 오히려 더 힘든 건가 하는 막연한 생각도 들었다.
경영진까지 했던 경력이었지만, 미국은 하나도 모르는 인사부서장 경력이 너무나 애매한 내 위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불현듯 스쳐갔다.
일단 내 막연한 생각과 느낌을 확인해야 했다. 그 확인을 해줄, 이 시장에 대한 전문가가 필요했다. 이력서도 미국 스타일로 싹 바꿔줄 수 있는 사람이면 더 좋았다.
구글에서 'career consultant' 'resume screening' 등의 키워드를 넣어 찾기 시작했다. 1시간 정도만에 평판이 괜찮아 보이는 컨설턴트를 찾아냈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이 동네에서 대학을 나와 헤드헌터로 오래 일하고, 지금은 이력서 점검과 커리어 컨설팅을 하고 있는 여자 컨설턴트였다.
바로 이메일을 보냈더니 답장이 와서, 상담을 하게 되었다.
시간당 상담료가 상당히 비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분야를 잘 아는 전문가에게는 그만큼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 영문 이력서와 링크드인을 훑더니, 두 시간 정도 화면 공유를 하고 온라인으로 같이 작업을 하면 되겠다고 했다.
훌륭한 경력이나, 미국 스타일의 이력서가 아니라고 했다. 링크드인 프로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더니, 일단 인터뷰 요청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이력서를 고쳐서 진행한다면, 미국 내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 브랜드에서는 상당히 관심을 가질만한 스펙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미국에서의 경력이 전무하니 처음부터 매니지먼트 포지션은 무리라는 현실적인 조언도 해주었다.
또 하나, 미국은 노동법이나, 근로기준법 등의 법률도 연방법과 캘리포니아 주법이 나눠져 있어서, 법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가 필요하다는 조언과 함께 온라인으로 당장 공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추천해 주었다.
추천받은 대로 2시간 워크숍을 함께 진행하면서 이력서를 업데이트했다. 추천받은 공부나 자격증(미국은 자격증의 나라라, 모든 분야에 자격증이 있다. 심지어 HR에 관한 자격증도 여러 가지다) 시험 준비도 시작했다.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나자 연락이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전화 인터뷰를 하고, 1차 온라인 화상 인터뷰를 여러 차례 꽤 여러 회사와 진행했으나, 금방 오퍼를 받지는 못했다. 인터뷰 도중 깨달은 점은 미국에서 경력은 전무한데 전체 경력은 또 무겁기도 해서, 과연 실무를 하려고 할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을 보이는 모습이 일관적으로 보였다.
몇 차례 최종 인터뷰까지 갔으나 고배를 마시고, 컨설턴트와 다시 한번 이력서를 좀 더 가볍게 수정했다. 같은 내용이지만 좀 더 실무경험에 포커스 한 두 번째 버전의 이력서가 나왔다.
좀 더 가볍게 다듬은 두 번째 이력서를 돌리자 좀 더 연락이 많이 오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 브랜드 회사가 주였다. 컨설턴트의 말로는 이력서를 돌린 숫자의 5-10%의 회사에서 첫 연락이 오면 이력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 정도 비율로 연락이 왔고, 첫 연락이 온 회사의 반 절 정도에서 다음 인터뷰 요청이 왔다.
면접을 수십 차례 보니, 인터뷰 요령도 느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면접을 보고 인터뷰 보는 사람들의 질문을 들으면서, 취업 준비 초기에 막연하게 느낌으로만 있었던 점들을 하나씩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 회사의 면접관들은 한국에 비해 이 사람이 어떤 구체적인 스킬의 전문가인가가 중요했다. 포지션이 세분화되어 있는 것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내가 했던 분야가 한국 전문가라는 부분이 다른 분야에 비해 특히 중요했던 일이라, 시장을 바꾼 것이 특히 약점일 수 있겠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IT 나 파이낸스 같은 직종보다, HR, 커뮤니케이션, 대관 같은 분야는 지역 전문지식이 중요한 분야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지역을 바꿨으니, 강점이던 부분이 이곳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선 인정하고,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할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지역 전문지식 부분보다는 회사 생활에서 범용적으로 통용되는 스킬이나, 능력이 뛰어남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또 첫 직장은 직급을 한 단계 낮추더라도, 실무를 배울 수 있는 조건의 직장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몇 군데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마지막으로 선택한(선택당한) 지금 현재의 직장도 그 점을 가장 중요하게 보았다. 인터뷰 과정에서 미국에서 HR을 오래 한 동료들이 있음을 확인했고, 그들과 함께 일하다 보면 빠른 시간 내에 미국의 HR practice를 배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 하나 정말 큰 걸림돌이 되었던 점은 한국에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신분(Status)'의 제약에 따른 것이었다. 다행히 미국에 올 때 일을 할 수 있는 비자를 받아서 건너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말은 나를 채용하는 회사에서 비자 스폰서십을 해 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니, 비자가 필요한 다른 구직자들에 비해서 나은 조건이었다. 나중에 일을 시작하면서 직접 겪게 된 비자 스폰서십 과정은 비용도 들지만 각종 서류며, 변호사와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이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스폰서십은 필요 없어서 다행이었으나, 시민권자나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후보자들에 비해서는 불리한 조건임도 사실이었다. 비자란 것이 기한이 있고, 그 이후로 연장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최종 면접까지 일관적으로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몇몇 회사들에서 결국에는 같은 조건일 때 나 말고 다른 후보자를 선택한 중요한 이유 될 수 있는 부분임을 나중에 깨달았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취업할 때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비록 잘 안된 인터뷰가 잘 된 인터뷰보다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고 느낀 점이 많았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배우고 느꼈던 점이 나중에 회사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도 도움이 많이 됐다. 구직자의 입장이 되어 본 것이 채용 당사자가 되었을 때 채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에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됐다.
그렇게 미국에서 다시 회사원 생활을 시작한 지도 벌써 거의 1년이 돼 간다.
역시 뭐든 겪어봐야 제대로 안다고, 한국에서 했던 직장생활과는 다른 부분도 많고, 내가 기대했던 내용과 다른 점도 많이 보인다.
하나 확실한 점은 매일매일 좌충우돌이지만 부딪히고 겪은 만큼 배우고 있다는 점이다.
역시나 쉬운게 없지만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위안 삼으면서 오늘도 출근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