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온다.
아직 반백년도 채 살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생각해 보면 내게도 몇 번의 기회가 왔었던 것 같다. 엄청난 부자가 될 기회는 비록 아직(!) 오지 않았지만, 커리어상 한 단계 점프할 수 있었던 기회는 적어도 세 번 정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매번 기회=위기라는 아이러니한 공식도 있었다.
첫 번째 기회(위기)는 거의 첫 직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조그만 커뮤니케이션 에이전시에 들어간 지 육 개월 만에 찾아왔다. 왜 첫 직장이 아니라 거의 첫 직장인지를 잠깐 설명해야겠다. 대학 졸업을 앞둔 4학년 2학기, 여러 군데 원서를 넣었지만 내가 원하던 '대기업'의 최종 면접에서는 모두 떨어지고(왜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학벌이나, 면접이나 모두 뒤처지지 않았던 것 같은데, 당시만 해도 여자라서 떨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던 때였다) 단 한 군데 대기업에 합격하여, 12월에 연수원에 입소했다. 1달간의 연수를 마치고, 그룹사에 배치된 지 1달도 안된 시점에 학교 취업정보실의 추천으로 레쥬메를 제출했었던 이름도 낯선 회사에서 면접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어디라고? 할 정도로 낯선 이름의 작은 회사였다.
그렇지만 당시 대부분의 회사가 여전히 토요일 반일 근무를 하던 것과 달리 외국계 기업이라 토요일에 근무가 없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면접에 갔고, 합격했다. 초봉 1,800만 원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다행히 토요일엔 근무하지 않았다. 야호!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 조차도 잘 모르고 덜컥 입사를 했다. 토요일에 쉬고, 외국계 회사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다. 면접자였던 이사님에게 물어봤는데, 정성껏 대답을 해주셨으나, 그래도 잘 이해가 안가 갸우뚱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용기로 내린 결정이었는지...
2000년 2월의 어느 날, 그렇게 나는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만한 대기업에 입사한 지 두 달 만에 사표를 던지고, 두 번째 (실질적으로는 첫 번째 직장)에 첫 출근을 했고, 그 달 말에 대학을 졸업했다. "우리 회사는 대학 졸업도 시켜주는 좋은 회사"라는 특유의 농담과 함께 졸업식에 다녀온 내게 꽃다발을 주던 영국인 사장님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 분은 나중에 내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선 "아기 같았던 내 직원을 낚아채간 도둑놈은 누구냐?"라고 농담하면서 축하해 줬던 그런 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홍보실이 없던 많은 회사에서 홍보 및 대관업무를 외주로 맡기던 communication consultancy였다. 한국 사무실은 작았지만, 입사하고 나서 알고 보니 뉴욕에 본사를 둔 전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 에이전시였다. 지금 생각하면 운이 억세게도 좋았던 것 같다는 생각만 들뿐이다. 결과적으로 이 첫 직장이 내가 외국계 기업으로 이어지는 커리어를 개발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계기였다. 여성 직장인으로서 겪은 유리천장은 분명히 있었지만, 국내 대기업보다는 아무래도 덜했을 것이고, 평소 고분고분해 보이지만 늘 속에서 '불타고' 있던 나의 '캐릭터'가 그나마 장점으로 발휘될 수 있었던 '외국계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이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배치받은 팀은 국방과 관련된 전투기, 미사일 등을 만들던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전 세계적인 클라이언트를 주로 담당하던 팀이었다. 팀의 메인 AE(Account Executive) 였던 남자 과장님이 계셨고, 난 그 밑에서 그를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아침마다 클라이언트가 관심 가질 만한 뉴스를 선정하여, 영어로 번역, 요약해서 미국인 차장님에게 검수를 받고 클라이언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점심엔 사수인 과장님이 기자를 만나 점심 먹는 자리에 따라 나가기도 했고, 오후엔 클라이언트 사무실을 방문하여 미팅하고, 리포트 작성을 보조하기도 했다. 첫 6개월은 이것저것 시키는 것을 하면서 정신없이 보냈는데, 입사한 지 7개월 만에 클라이언트를 담당하던 과장님이 갑자기 퇴사를 통보했다. 당시 붐이었던 벤처기업으로 이직을 하면서 연봉을 많이 올려 받는다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청천벽력이었다. 국방 관련 기업들이라 모두 퇴역한 군인 장성들이거나 나이 많은 비즈니스맨들이 주 클라이언트였다. 대학을 갓 졸업한 25살짜리가 그런 어마무시한 클라이언트들을 어떻게 하지? 밤에 잠이 안 왔다. 더구나 회사에서는 그 일에 대해 자세히 아는 과장, 차장급이 없었다. 워낙 이슈가 특수하기도 했고, 담당했던 과장님이 전담으로 하던 일이라, 회사에서도 나 말고는 대안이 없던 상황이었던 것 같다. 맡아서 한번 해보라고 했다. "윗대가리를 내보냈으니 이제 대가리가 되는 일만 남았다"라는 응원인 듯 아닌듯한 응원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첫 번째 기회이자 위기였다.
다행히 첫 6개월간 나는 열심히 관련 기사를 모니터링하는 일을 한 덕분에 주요한 이슈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클라이언트들과의 관계도 괜찮았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을 갓 졸업한 25살 어린 여자애가 뭘 안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걸 보고 그 노회 한 클라이언트들이 너그럽고 귀엽게 봐주셨던 것 같다. 어느 날 미국 굴지의 국방기업의 부사장이던 퇴역 장성 출신의 클라이언트가 직접 손글씨로 신라호텔 편지지에 써준 내용 중 한 줄이 기억난다. "너는 60살 먹은 사람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24살의 레이디"라고 쓰여 있는 편지지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을 만큼 소중한 격려였다.
밤을 새든 어쩌든 리포트도 써냈고, 클라이언트와의 미팅도, 기자들과의 미팅도 꾸역꾸역 해냈다. 물론 직급이 필요할 때는 옆팀 차장님을 모시고 미팅에 갔다. 아무리 해도 나는 사원이었고, 어떤 미팅은 직급이 높은 자가 필요할 때가 있었다. 버겁게 보이던 클라이언트 3곳을 떠맡은 지 3개월 동안 나름대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퍼부었다. 이미 회사를 나간 사수에게 하루에 열 번도 더 전화를 걸거나 이직한 벤처기업이 있던 강남역을 찾아가 매일 저녁에 그를 괴롭힌 것도 그때였다.
폭풍 같던 3개월 정도가 지난 후에는 클라이언트들도, 회사도 크게 걱정하지 않고 내게 그 어카운트를 맡기게 되었다. 3개 클라이언트를 합쳐서 한 달에 50,000달러 정도를 지불했던 클라이언트들이었으니 비중이 작지 않은 고객사들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그 시간을 버텨낸 후 일말의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앞이 캄캄하던 시절을 지나, 뭐든 도와주셨던 회사 선배들과 지금 생각해도 고맙기만 하던 클라이언트의 격려와 칭찬에 힘입어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다. 점점 자신이 붙고, 속도도 붙고, 아이디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주요 일간지 국방전문기자들을 끌고 유럽 4개국의 비행기 제작공장을 도는 Fam trip(기업 소개를 위해 기자들을 데리고 소개해 주는 여행, 주로 이후에 기사로 소개가 된다)을 기획하기도 했다. 그때 10박 11일 동안 동행했던 기자들 중 대학교 같은 과의 직속선배님을 만나 그 이후도 도움을 받는 인연이 되기도 했다.
위기가 될 수 있었던 기회였지만, 그 기회를 살린 것은 나름대로의 노력과 더불어, (처음부터 대안이 없었다는 이유로 큰 기대가 없었겠지만) 그래도 일을 맡겨주었던 회사의 결정과 믿음이었다. 그때 얻은 자신감은 그 이후 직장생활의 큰 토대가 되었다. 무슨 일이든 '일단 부딪혀 보자, 안되면 말고'라는 배짱이 처음 생겼던 시기이기도 했다.
운이 좋게도 부딪혀서 안된 적보다 그래도 시도 안 한 것보다 나았던 적이 더 많았다. 직장 새내기 시절, 개고생 했던 그 시절에 만났던 인연들은 직장을 옮긴 뒤로도 인연을 이어가며 나를 도와주는 분들이 되었다. 내 소중한 첫 번째 기회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귀한 인연과 소중한 시간으로 내 기억과 경험에 고스란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