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만에 아들을 되찾아왔다.
미국으로 갑자기 오기로 결정한 몇 가지 큰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식구끼리만 살아보고 싶다"는 어찌 보면 당연하고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다. 결혼 후 첫 1년 남짓을 제외하고는 난 항상 시댁식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갑자기 우리 집에 짐을 들고 들어오신 시어머니는 그 길로 식구가 되어 15년째 같이 살고 있었고, 고맙게도 아이를 잘 돌봐 주셨지만, 이제는 더 이상 도움이 필요 없었다.
정말 싹수없게 들리는 며느리의 입장이지만, 남편이 미국으로 이주할 기회를 만들어 오자고 했을 때, 자의만은 아니었던 시어머니의 아들 육아를 끝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집을 전세로 주고, 짐을 정리하면서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이제 우리끼리만 살 수 있겠다는 설렘이 훨씬 더 강했다. 결혼한 지 17년 만에 찾아온 황금 같은 기회, 태평양 정도는 건너줘야 우리 식구끼리의 삶이 가능했던 그 상황에서 나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그 기회를 마다하기 힘들었다.
아이는 태어난 지 3개월 후부터 시어머니의 손에 맡겨졌다. 내 의견은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시아버지도, 남편도 "아이는 엄마(시어머니)가 잘 키운다"라고 임신 초기부터 얘기해 왔고,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날 보고서는 손이 귀한 집에서 난 유일한 자손을 남의 손에 맡기느니 시어머니가 훨씬 낫다고 모든 식구가 생각한 것 같다. 그냥 자연스럽게 시어머니가 아이를 보시게 되었다. 막내(남편)를 키운 지 37년 만에 갓난아이를 목욕시키면서 잠시 어색해하셨지만, 곧 시이모 두 분의 조력도 얻게 되어 세 여자(아니다. 싱글인 시누이까지 네 여자)가 내 유일한 아들을 키우게 되었다.
그 덕분에(때문에?) 나는 직장에 더 열심히 다녔고, 야근도 더 많이 했으며(왠지 집에 일찍 들어가기가 싫었다) 연봉도 더 올려 받고, 승진도 빨랐다. 30대에 임원을 달고, 일은 더 많아졌다. 어린이집 다니던 시절만 해도, 어린이집 선생님이 주신 수첩에 "엄마 집에 빨리 오세요"라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놓고 엄마를 그리워하던 아들이었지만, 어느새 훌쩍 큰 아들은 더 이상 엄마를 찾지 않았고, 세 할머니와 고모의 손에서 이미 익숙하게 키워지고 있었다.
늘 집에서 봤지만, 아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기억도 별로 없다. 어쩌다 맘먹고 대화를 시작하면 대부분 큰소리가 났고, 큰 소리가 한마디만 나오면 시어머니가 중재를 하셨다. 어떨 때는 큰 소리가 나더라도 끝까지 아이와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조용한 것만이 답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번번이 시어머니에게 막혔던 우리의 대화와 부딪힘은 미국에 오고 나서 첫 6개월간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오 마이 갓!이었다.
힘들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필요했고 반가운 시간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엄마라고 불렸지만 엄마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냥 내 이름 같은 고유명사 같은 '엄마'였다. 내게 고민을 얘기하지도, 기쁨을 나누지도, 자신의 진로에 대한 속을 털어놓지도 않았던 아들은 미국에 오자,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얘기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영어도 잘 못하던 아들이 오자마자 친구가 생길 리도 만무했고, 집에는 아빠와 엄마밖에 없는데, 아빠는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들어오는 존재였다. 자연스럽게 나와의 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배고파""뭐 사러 가자" 등의 일상적인 대화로 시작된 우리의 소통은 "오늘 학교에서 누구누구 하고 한 조가 됐는데, 아무래도 프리라이드하려는 것 같아" 정도까지 깊어지고 넓어졌다.
아이는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로 화를 내기도 했다. "엄마는 엄마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게 문제야!"라는 심한 말도 들었다. 듣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올라 한판 붙기도 했는데, 중재자가 없으니 처음엔 더 최악으로 가지 않기 위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몰라 당황했던 기억까지 있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나자, 아이도 나도 멈추는 지점을 깨닫게 되었다. 멈추는 방법? 지점? 어떤 것이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어찌 됐든 우리가 큰소리 나게 부딪히는 일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나는 무작정 미국에 왔지만, 아들과의 관계회복은 나의 무모했던 결정이 준 가장 큰 선물이다. 한국에서 살던 것처럼의 세팅이었다면(시어머니와의 한집 살이) 이런 귀한 선물은 절대로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 살면서 아이를 만난 16년 동안 나는 엄마지만 엄마가 아니었다. 2년 전 미국에 와서야 16년 만에 "되찾은" 내 아들은 비록 '유치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엄마에게 실망하고, 부딪힐지언정 진심으로 엄마에게 학교 얘기도 조곤조곤해주고, 고민도 얘기하는 진짜 내 아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 나는 소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커리어에 '성공' 한 사람이었지만, 내 단 하나뿐인 아이는 그 시간 동안 엄마를 아니 엄마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었다.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고, 후회는 해봤자니, 지금이라도 더 많은 사랑을 퍼부어 주는 수밖에...
나도 모르게 아들이 크는 모습을 잘 알지 못했던 그 시간이 아쉽고 되돌리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드는 오늘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너무나 다행이다 싶은 오늘이기도 하다.